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때 조선인 사기장이 많이 끌려갔고 그중에 이삼평이 있다. 그는 일본에서 도자기의 조상이 된다.
임진왜란
1592년 임진왜란, 1597년 정유재란까지 통틀어서 임진왜란이라고 칭한다. 1592년 4월 30일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왕은 수도를 버리고 도망을 갔고 90여 척의 배로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단 17일 만에 지방의 성을 함락시키고 한양 앞까지 쳐들어 왔던 것이다. 선조는 평양성에서 조선의 국경인 의주까지 쫓겨갔고 결국 명나라에 군대를 요청하기에 이른다. 임진왜란은 무려 7년 동안 이어졌다.
임진왜란
조선+명나라 연합군에 밀려 일본은 경남 해안까지 밀려났고 그곳에서 성을 짓고 버티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명나라와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고 전쟁을 끝내고 떠나는 조건으로 여러 가지 요구사항을 요청했으나 그중에 절대 들어줄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정유재란
결국 명나라와 일본의 협상은 쉽사리 성사되지 못했다. 그렇게 4년이나 시간을 끌었으나 결국 결렬된 것이다. 1597년 임진왜란의 정전 회담이 결렬됨에 따라 일본의 대대적인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정유재란의 목표
1597년 정유재란의 목표는 조선이었다. 조선 남부지역을 점령하고 조선 자원의 약탈이 목적이었다. 일본은 더 잔인하게 조선땅을 유린한다.
조선인 노예
일본은 전리품으로 조선인을 잡아갔다. 일본의 인신매매상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잡아가서 부산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싣고 가서 조선인을 국제 노예로 팔아버렸다. 당시 조선인 노예가 전 세계 노예 시장에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동방 여행기를 쓴 카를레티의 여행기에 보면 조선인 노예가 전 세계 노예 시장에 풀리면서 그 시세가 6분의 1로 내려갔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렇게 잡혀간 조선인들은 약 10~20만 명 가까이 되었고 일본이 조선인을 잡아간 이유는 일본 내의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서였고 또한 조선인을 팔아 부족한 군비를 마련하려 했던 것이다.
일본으로 끌려간 사기장들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했던 조선인 가운데 아주 귀하게 여겨 따로 선별해 끌고 간 조선인이 있었는데 그 기술은 바로 도자기 기술이었다. 당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자기 기술이 발달된 조선이었다.
일본 도자기의 신 이삼평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인 사기장 중에 아리타 지역을 부흥시킨 이삼평이 있다. 이삼평에 대한 기록은 우리나라에는 없다. 일본 기록에는 김해지역 사람인데 일본군에 붙잡혀서 길 안내 등의 협력을 한 것으로 비문에 새겨져 있다. 이삼평은 당시 18명의 조선인 사기장과 함께 도자기를 만들며 지낸다.
그러다 조선에서 가져온 고령토가 떨어지자 아리타 지역에 위치한 이즈미산에 다량의 장석을 발견하고 이곳에서 채굴한 광석으로 400년간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양이었다. 현재 이즈미 산은 1980년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이삼평은 이즈마야마 산 근처에 가마터를 짓고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1616년 일본 흙으로 만든 일본 최초의 백자를 만들어낸 것이다.
아리타 도자기 축제
그리고 아리타에 조선인 도자기 마을이 들어서게 되고 마을은 고급 자기를 대량 생산하는 공장으로 변하게 된다. 이곳에서 만든 아리타 도자기 수는 1650~1757년 약 100여 년 동안 수출한 도자기는 무려 120만 점 이상이었다. 도자기 판매 수입이 아리타 재정 수입의 약 90%를 차지했다. 그래서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으로 불리기도 한다. 조선 침략 이후 급성장한 일본의 자기 제조술은 해외에서도 알고 있었고 현재도 아리타에서는 도자기 축제를 하고 있다.
도조제
이삼평은 일본에서 도자기의 신(=조상) 도조로 불리고 있다. 이후 이삼평은 신으로 모시는 신사에 모셔져 지금 일본에서는 매년 5월 이삼평의 공을 기리는 도조제를 개최하고 있다.
일본에서 살게 되었으나 여전히 고향을 잊지 못한 조선인은 민족의 뿌리인 단군을 섬기고자 했고 사당을 짓고 명절 때마다 제사를 지내며 고국을 떠올리던 사기장들이었다. 이런 조선인 사기장들 흔적이 일본 오카와치야마에 아직도 남아있다. 탑을 이루고 있는 것은 신원 확인이 불가한 조선인 사기장 880명의 묘비이다. 원래 마을 곳곳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사연을 안타깝게 여긴 한 스님이 1938년 880개의 묘비를 모아 탑을 만든 것이다.
이도다완
현재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이도다완이다. 그러다 이도다완은 조선에서 만들어진 그릇으로 조선의 민가에서 사용하던 제기용 그릇이었는데 일본에서는 권력층의 다도용 다구로 사용되었다.
일본의 차를 마시는 모임은 최고위 권력층만 할 수 있는 행사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차 마시는 것을 즐겼던 사람으로 조선인들이 만든 이도다완을 애용했고 부와 명예의 상징이자 최고의 사치품이 이도다완이었다.
조선에서 평범했던 이도다완이 일본에서 인기를 끌었던 또 다른 이유는 당시 일본은 대부분 나무 그릇을 사용하거나 도기를 사용했는데 조선에서 흔했던 자기를 만드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이 자기를 만들 수 없던 이유
첫째 일본이 자기를 만들 수 없던 이유는 자기의 재료를 몰랐다. 조선 자기는 순백의 흰색인데 빛깔을 제대로 내려면 장석이라는 하얀 광석이 필요했다. 장석을 곱게 갈면 자기의 필수 재료인 고령토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일본은 이렇게 고령토를 얻는 방법 자체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두 번째는 고화력의 가마를 만들지 못했다. 자기를 굽는 데는 1300도 이상의 화력이 필요했고 그리고 그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가마가 필요했다. 그렇게 얻어내는 자기는 단단하고 얇고 가벼우며 두드리면 경쾌한 소리가 나는 훌륭한 자기를 만들 수 있었다.
세 번째는 유약을 만드는 기술이 없었다. 도자기의 표면에 덧씌우는 약으로 변색을 방지하고 흠집 나지 않도록 표면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유약이었다. 기술이 없어 일본은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던 일본이었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 자기를 만드는 기술을 가진 사기장을 대거 잡아 오도록 명령했다. 또한 약 8년간 쓸 수 있는 대량의 고령토를 가져갔던 것이다.
현재 일본에서 세계에서도 유명한 도자기 생산지 일본 규슈 등은 조선인 포로로 잡혀간 사기장의 기술이 지금까지 이어져 지역 자체가 세계에서 손꼽히는 곳이다.
일본인이 훔쳐간 또 다른 것
임진왜란 당시 일본이 훔쳐간 것 중에는 책도 있었다. 귀한 책을 가격은 대학 중용 책은 2년 치 쌀값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왕세자가 공부할 책이 없어서 선비들에게 빌려와 책을 읽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책을 약탈해 갔을까?
16세기 후반까지 일본에서는 끊임없이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전으로 소실된 책으로 인해 조선에서 훔쳐서 보충을 하려 했던 것이다. 조선의 궁궐과 양반집 등의 책을 모조리 긁어모아 약 10만 권을 약탈해 갔다. 유학, 불교, 문집 등 어마어마한 책들을 가져갔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발전
임진왜란 이후 일본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특히 문화적인 발전이 엄청났다. 조선에서 들어온 활자와 유학이 들어오면서 출판문화의 발달로 보급된 일본 교육기관 데라코야, 또한 제조 기술 확보로 세계 도자기 시장을 장악한 일본이었고 조선 기술의 유입으로 각종 제조술이 발달되었다.
반면 조선은 전쟁 후 무너진 사회로 변화의 계기가 필요했고 기술, 문화인력에 심각한 손실을 받게 되어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되었고 임진왜란은 일본이 조선의 문화를 훔쳐간 문화 전쟁이었다. 메이지 시대 일본의 역사학자는 임진왜란을 일본의 사치스러운 해외 유학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유학 비용은 조선인의 피와 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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