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통교 무덤돌
서울 중심에 위치한 청계천의 22개 다리 중 하나인 광통교에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청계천 광통교 다릿돌의 정체는 조선 왕가 무덤에 병풍석이다.
그렇다면 무덤의 돌이 왜 여기 있을까?
이 무덤의 주인은 조선의 3번째 왕, 태종 이방원의 어머니 신덕왕후 강씨 무덤이다.
신덕왕후 강씨는 누구?
이방원은 세종의 아버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아들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드라마, 영화에서 워낙 많이 나왔던 인물로 이방원은 8남매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이방원의 두 번째 어머니 강씨에게는 두명의 아들과 한명의 딸이 있었다. 고려말은 첩과 처의 구분이 없었고 정략결혼을 통해 이성계의 2번째 부인이 된 강씨였다. 강씨는 비록 친 어머니는 아니었지만 이성계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신덕왕후 강씨 집안
이방원의 집안은 홍건족과 왜구로부터 고려를 지킨 무신 가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계는 고려의 중심 세력으로 자리 잡지 못 했었다. 이성기 아버지는 동북면의 신흥 무인 세력였지만 권문세족이 장악하고 있는 중앙 경계로 진출 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중심 세력에서 물러나 있던 이방원의 집안을 권문세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집안으로 만들어 준 것이 권문세족 집안에 딸인 강씨였다.
그래서 이방원의 집안을 개경에서 자리 잡도록 도움을 준 강씨의 집안으로 중앙 정계로 진출 할 수 있었고 당시에 중앙 경계로 진출 할 수 있었고 당시에 집안은 이성계의 무력으로 재산을 보호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이성계의 집안은 강씨 집안에 힘으로 무력, 경제력, 명예까지 갖춘 집안이 되었다.
이방원 집안 고려 최고 권력을 가지다.
이때 이방원의 나이는 여덟 살이었다. 이방원은 총명해서 17세에 이방원은 과거 시험에 합격한다. 그리고 이방원은 조선 역사상 과거 시험에 합격한 유일한 왕이다, 무신 집안인 전주이씨 가문에 첫 번째 문신이 나온 것이다.
요동 정벌에 나섰던 아버지 이성계의 회군 결정으로 이성계의 집안은 순식간에 역적이 될 위기에 처한다. 이때 이방원은 기지를 발휘하여 가족이 인질로 잡히는 것을 막게 되고 이로 인해 이성계는 조선건국을 할수 있는 발판이 된다. 또한 이방원은 조선 건국의 숨은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아버지 이성계가 개경을 장악했다는 소식이 들려 왔고 이 위화도회군 이후에 이성의 집안은 고려 최고의 권력을 갖게 된다.
이방원 정몽주 살해
그러나 정몽주와 대립을 하게 되면서 이성계가 말에서 낙마하는 사고 이후에 이성계의 측근 세력을 모두 귀향을 보내게 되고 이로인해 이성계 집안은 다시 한번 위협을 느끼게 된다 . 이 때문에 이방원은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이방원이 죽였고 심지어 머리를 잘라 저잣거리에 걸어 두기까지 했다.
이방원은 왜 신덕왕후와 원수가 되었나?
신덕왕후 강씨 조선 최초 왕비되다.
그리고 1392년 7월 17일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다. 정몽주가 살해 되고 석달 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강씨는 조선 최초의 왕비가 된다. 이방원의 어머니 한씨 조선 건국 1년 전에 사망했다. 그리고 전장에서 공을 세운 둘째형이 이방과 이복동생 이방번은 의흥친위군 정3품 지휘관직인 절제사로 임명된다.
외면 당한 이방원
그러나 1392년 2월 이방원은 동북면으로 가서 제사를 맡으라는 아버지의 지시가 있었다. 전라도 절제사로 임명된다. 이것은 이복 동생 방번의 지휘하에 있던 상황이었다. 군권, 권력도 모두 박탈된 상태였다. 그 이유는 이방원이 정몽주를 살해한 것에 대한 이성의 분노가 컸기 때문이다. 그리고 항상 이방원에게 힘이 되어줬던 신덕왕후 강씨는 이번에는 철저히 이방원을 외면했다.
신덕왕후 아들 세자책봉
그리고 이성계는 강씨의 첫 번째 아들 이방번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방번을 신하들이 반대했다. 당시 이방번의 부인이 고려왕씨 집안으로 자칫 고려의 잔존세력과 연합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이성계가 뜻을 굽힐 기미가 없자 한 신하가 이방석을 추천하게 되고 이렇게 아무공도 없던 이방석이 조선의 초대 왕세자가 된다.
신덕왕후 사망
그리고 이성계는 이방원을 명나라 사신으로 보내고 다녀온 이후에도 이방원은 여전히 배척당한다. 그러던 중 1396년 어머니 신덕왕후 강씨가 사망한다. 큰 슬픔에 빠진 이성계는 왕비의 강씨 무덤을 크게 짓게 하고 3년간 신덕왕후의 무덤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궁궐에서 고개를 들면 볼수 있는 덕수궁 근처에 무덤을 지었다 . 이것은 이성계의 정치적 의도도 숨어있었는데 황후의 무덤을 가까이 두어 세자의 권위를 세우려 한 것이다.
왕자의 난
명나라에서 돌아온 이방원의 정치적 입지는 나아지지 않았다. 세자 이방석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운 정도전 일파는 호시탐탐 이방원의 정치적 숨통을 조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도전은 사병혁파를 단행한다. 위기에 처한 이방원은 아버지가 정한 세자를 바꾸기 위해 병사를 일으키고 왕자의 난을 벌인다. 사병혁파에 반대하는 세력과 합세하여 아내 민씨가 숨겨놓은 갑옷과 무기를 가지고 왕자의 난은 성공하게 된다.
이때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고 강씨의 두 아들 방석과 방번또한 경복궁 밖에서 참살을 당한다. 왕자의 난 이후 바로 자신이 왕위에 오르면 집권 욕심에 대한 의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둘째 형인 이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그가 조선의 2대왕 정종이 된다. 자식이 없는 이방과였기에 차기 왕권도 노릴수 있었기 때문이다.
2차 왕자의 난
그러나 이 결정에 불만을 품은 넷째 형 이방간에 의해 2번째 왕자의 난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방간은 이방원에 제압당하고 이방원은 마침내 조선의 3대왕 태종으로 즉위한다. 왕자의 난을 일으킨지 2년 4개월 만에 마침내 태종 이방원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방원 신덕왕후 강씨 무덤 훼손
왕이 된 이방원은 오랫동안 복수를 다짐했던 일이 있었다. 그 인물은 바로 신덕왕후 강씨였다. 이방원은 험난한 피난길에서 강씨를 친어머니처럼 보살폈고 정적의 위험에서도 그녀를 보호했었다. 그러나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만들기 위해 이방원을 철저하게 배척한 강씨에 대한 배신이 컸었다. 그러나 강씨는 이미 죽고 없었다. 이렇게 아버지 이성계가 죽고나자 오랫동안 기다렸던 이방원의 복수가 시작된다.
아버지 이성계가 죽고 1년도 안되서 1409년 4월 13일 강씨의 봉분을 완전히 깍아 무덤의 흔적을 남기지 말라고 했다.결국 무덤을 파내 도성 밖 산기슭으로 옮겨버렸다. 신덕왕후의 무덤을 훼손한 것이다. 그리고 신덕왕후의 지위를 후궁강씨로 강등시켜버렸다. 무덤 역시 능이 아닌 묘로 격하시켰고 이후에 신덕왕후의 제사는 왕실에서 모시지 않았고 능에 있던 정자는 헐어서 건물을 짓는데 사용했다.
현재 성북구에 있는 정릉이다. 1402년 신덕왕후의 원수를 갚겟다며 친족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것은 세종 때까지 상황이 이어져서 신덕왕후 초상화를 불태우기까지 한다. 1410년 청계천의 다리가 큰 홍수로 떠내려 가자 이방원은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석을 다리를 만드는데 사용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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