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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벌거벗은 한국사

한명회 계유정난으로 권력의 정점에 서다. 17회

한명회은 어떻게 조선의 왕을 바꿨나?

한명회 관직오르다.

한명회는 과거시험에 한번도 합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만의 특별한 능력이 있었는데 그것은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능력, 지략과 처세술만큼은 뛰어났다.  과거시험에 한번도 합격하지 못한 한명회는 음서를 통해 관직에 오른다. 음서란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들의 자식이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제도를 말한다. 이렇게 음서를 통해 38살의 나이로 관직에 오르게 된다. 처음 한명회가 오른관직은 경덕궁 궁지기였다. 종9품 말단 관리직으로 시작한다.  

 

 

수양대군과의 만남

말단 관리직으로 있던 한명회에게 당시 왕의 삼촌 수양대군이 찾아온다.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당시 수양대군은 위기에 처해있었다. 단종 주변 인사들의 수양대군을 정치적으로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그 중심인물에 좌의정 김종서가 있었다. 김종서는 태종, 세종, 문종, 단종까지 4명의 임금을 모신 인물로 단종이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왕을 보위하면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이때 왕을 보필하면서 과도한 인사문제 개입으로 부작용이 발생한다. 대신들이 후보자들의 이름  황표위에 황표를 붙이면 왕이그대로 낙점하는 인사 형태가 이루어지는 황표정사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정치적으로 고립되고 있던 수양대군이었다. 그리고 김종서는 수양대군의 동생 안평대군과 손을 잡게 되고 권력에서 완전히 밀려날 것을 우려 위기감을 느낀 수양대군이 자신의 권력을 되찾을 계획이 필요했다. 그 계획을 실현해 줄 책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모습을 한명회가 알고 있었고 한명회의 친구 권람에게 수양대군의 소개를 부탁했던 한명회였다. 

 

 

 

 

한명회의 계유정난 계책

수양대군은 권람으로부터 한명회를 적극 추천했고 수양대군은 이미 한명회를 믿게 되었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에게 말한다.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을 부추긴 한명회의 한마디 말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을 부추긴 한명회의 한마디 말

김종서 세력을 처단하는 것은 명분이 바른 일이기 때문에 절대 성공하지 못할 리가 없다. 고 말하고 수양대군은 한명회의 이 한마디를 듣고 역모를 준비하게 되었다. 

 

계유정난 준비 
수양대군은 김종서 세력을 처단을 계획하고 무사들을 모으기 위해 활쏘기 연습을 핑계로 무사들을 만나 술과 안주를 대접하라고 한명회는 조언했다. 이렇게 무사를 포섭하고 거사를 위한 병력 준비에 성공한다.  그리고 거사를 위해 홍달손이라는 한양 도성의 야간 순찰을 담당하던 무장을 포섭한다. 거서 중에 도성 출입을 통제해 적의 움직임을 차단하는 역할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수양대군은 거사를 위해 길을 나선다. 마침 이날은 홍달손이 한양도손을 감독하는 날이었다. 

 

계유정난 

1453년 10월 10일 김종서의 집으로 향한 수양대군은 편지를 건내며 읽어달라고 한다.  그리고 그 순간 수양대군은 김종서에게 철퇴를 내리쳤고 다음은 단종이었다. 한밤중 단종을 찾아간 수양대군은 김종서를 처단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왜 김종서를 처단했는지를 말한다.  이에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살려달라고 말했다. 

이때 한명회는 궁궐에 있었고 거짓 왕명을 빌어서 대신들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한밤중에 조정대신들이 한명씩 들어오고 첫 번째 문에 들어오면 대신 혼자 들어오게 하고 두 번째 문에서 이름과 얼굴을 확인 한 후 죽여나갔다. 그리고 살생부 명부에 있었으나 나오지 못한 대신들은 직접 병사들을 보내 마지막 한사람까지 처리했다. 

이날 목숨을 잃은 대신들이 수십여명에 달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한낱 궁지기에 불과했던 한명회의 살생부에 조정대신들이 목숨을 잃어갔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계유정난이다. 

 

 

 

역사속에 남은 계유정난 기록 
1453년 계유년에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 반대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그러나 단종실록에 기록된 사실은 김종서와 안평대군의 난을 수양대군이 진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왕인 단종이 관여하지 않은 일임에도 실록에 기록되었다. 

 

한명회 1등 공신되다. 
계유정난이후  조정의 모든 권력은 수양대군에게 넘어가고 정난 이후 거사에 가담한 43명을 공신으로 책봉한다. 당연히 한명회는 1등 공신으로 책봉된다. 

훗날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이렇게 설명했다.

 


계유정난 2년 후 수양대군은 단종에게 왕위를 넘겨받고 마침내 왕이 된다.  조선의 7대왕 세조의 탄생이었다.  한명회는 조선의 왕을 만든 킹메이커가 되었다. 

 

이후에 단종복위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조카 단종을 무참히 죽인다.

▶단종복위 운동과 사육신

 

한명회 도체찰사 임명

그 후에도 세조를 공격하려는 크고 작은 명분으로 세조를 공격하는 세력이 있었고 세조는 한명회를 더욱 의지하게 된다. 세조는 한명회를 조선시대 왕명으로 지방에 파견되어 군사관련 업무를 총괄하던 최고 관직인 도체찰사로 임명한 후 한명회가 지방을 도맡아 통제하고 반란을 막아주길 바랬던 조치였다. 

세조의 신임을 얻은 한명회는 세조 재위 14년 동안 14번에 도체찰사를 맡게 되었다. 세조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던 한명회를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1463년 좌의정, 1466년 영의정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천하가 한명회의 손안에 있었다. .

 

 

 

한명회 왕의 사돈되다. 

그러나 한명회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권력을 얻기 위해 세조와 사돈까지 맺는다. 한명회는 총 1남 4녀의 자식이 있었다.  자신의 셋째 딸을 세조의 둘째 아들 해양대군과 혼인시킨다.

 

 

그렇게 호의호식하던 한명회에게 위기가 닦친다. 이유는 세조가 병에 걸리게 되고 1468년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되자 한명회의 시대가 저무는 듯 했으나 한명회는 다시 한번 기회를 잡는다. 세조의 둘째 아들 예종(해양대군)이 왕에 오르면서 왕의 장인으로 다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한명회의 마지막 이야기 

 

 

압구정 유래 뜻, 한명회 죽음이 끝이 아니였다.

오늘날 강남의 가장 핫한 장소 압구정이 있다. 이 압구정은 조선시대에도 가장 핫한 장소였던 곳이다. 바로 이곳에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던 한명회가 살았기 때문이다. 한명회의 권력 조선의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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