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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벌거벗은 한국사

어사 박문수 업적 (나주 괘서 사건) 23회 암행어사의 대명사 어사 박문수가 있다. 박문수는 조선의 대표 암행어사로 기억되고 있으나 그는 사실 한번도 암행어사였던 적이없다. 지방을 감찰하는 어사를 맡았던 적은 있다. 그는 숨어다니는 암행은 하지 않되 지방을 감찰했던 어사였다.  어사를 하면서 백성들에게 좋은 일을 많이해서 백성들에게 정의의 상징 암행어사로 불리게 되었다.   어사 박문수 성격그러나 조정에서 박문수는 이단아에 미치광이로 취급되었다.  박문수는 왜 조정의 이단아가 되었나?  영남지방에서 돌아온 박문수는 왕에게 직접 전복을 내보이며 영남군수의 비리를 고할만큼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건장한 풍채와 함께 거침없는 언행도 불사했던 인물이었다.   냉정하고 예민하고 깐깐하기로 소문난 영조였지만 서슴없이 직언하는 박문수를 아꼈다. 영조가 박문.. 더보기
조선어학회 우리말 사전 역사 (말모이/조선어학회 사건) (24-2) 광화문에 가면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 동상 옆에 한글을 지키신 분들을 위한 기념탑이 있다. 조선어학회 탑이다. 말모이 한글이라는 이름을 만든 주시경 선생은 한가지 소원이 있었다. 우리말 사전을 제작하는 것이었다. 주시경 선생은 우리말이 사라질수 있는 위기감을 느꼈고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말과 글로 쓰인 사전이 필요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전 편찬은 민족 정체성과 독립을 위한 길이라고 믿었던 주시경 선생이었다. 그렇게 1911년 조선어 사전 편찬을 그의 제자들과 계획한다. 이때 만들려고 했던 사전의 이름이 ‘말모이’였다. 그러나 사전 제작은 4년만에 중단된다. 1914년 주시경이 돌연 사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5년이 흘러갔고 1929년 조선어 사전 편찬 작업이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한다. 조선어연.. 더보기
한글 어원 및 한글 이름은 누가, 언제 만들었나? 24-1회 한글 이름 탄생 시기일제식민지 시절 일제는 우리의 말과 글까지 철저히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한글을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목숨 걸고 우리말을 지키려했던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글을 지켜내는 과정은 힘들었다.  당시 학교에서는 조선말이 금지되어 있었고 우리말을 쓰면 처벌을 받았다. 학교에서는 조선 총독부가 펴낸 국어 교과서 국어독본을 사용하고 있었다. 안에는 모두 일본어로 제작되어 있었다.  나라를 빼앗긴 후 조선의 국어는 일본어였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말은 새로운 이름이 필요해졌다. '한글' 이라는 말은 세종대왕때부터 썻을 거라 생각하는데 아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이었고 한글이라는 말은 일제강점기때 생겨난 말이다.    한글 어원 한글이라는 이름을 지은 이는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이었다.. 더보기
하멜 표류기 이야기 38회 하멜 표류기는 유럽에서 조선을 본격적으로 알린 최초의 책으로 네덜란드인 하멜이 낯선 조선 땅에서 보낸 약 13 년간의 표류 생활이다. 17세기 조선 제주도를 그린 이 그림은 외국에서 쓴 헨드릭 하멜이 쓴 하멜 표류기에 있는 그림이다. 하멜일행 제주도 표류 1653년 8월 23살 하멜을 포함 총 64명의 네덜란드 선원들은 바다를 항해하던 중 태풍에 휩쓸려 암초에 부딪혀 배가 산산이 부서졌다. 얼마 후 살아남은 하멜은 조선의 제주도에 표류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하멜은 자신의 동료를 찾았고 64명 중 36명만 살아남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얼마뒤 멀리서 말총을 짠 모자를 쓴 조선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들도 하멜을 보고 그냥 돌아가버렸다. 그리고 표류 3일차 되던 날 1~2천여 명의 군사들이 들이닥쳐 .. 더보기
이완용 어떻게 친미파 -> 매국노 친일파가 되었나? 덕수궁의 일부였던 중명전(밝은 빛이 이어진다는 뜻)은 황실 도서관이었다. 광명이 계속 비추어야 할 이곳에서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1905년 11월 17일 저녁 일본헌병이 덕수궁 중명전에 들이닥친다. 퇴궐준비를 하던 대한제국의 대신들은 겁에 질려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일본 헌병은 대신들을 회의실에 밀어놓고 감금했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포기하는 조약에 찬성하라고 강요했던 것이다. 중명전은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아간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이다. 이때 을사늑약에 적극 찬성했던 단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완용이다. 이완용 일본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완용은 처음부터 친일파는 아니였다. 그는 처음에 일본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고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인물이었다. 이완용 어떻게 친미.. 더보기
장희빈은 어떻게 중전이 되었나? (20회) 1686년 조선의 19대 왕 숙종은 장희빈에게 빠져 국정을 소홀이하고 있다는 상소에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숙종과 장희빈의 문제가 국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장희빈은 누구? 을 통해 알려진 장희빈의 실제이름은 장옥정이다. 희빈은 빈=은 서열1위의 후궁이라는 뜻이다. 많은 드라마에 등장하면서 장희빈이라는 이름이 친숙해진 것이다. . 장희빈은 역관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당시 역관의 신분은 중인으로 재력있는 중인의 신분으로 잘살고 있었으나 아버지가 갑자기 죽고 어머니가 장희빈을 궁녀로 들여보냈다. 그래서 장희빈은 궁녀의 생활을 시작했다. 장희빈은 실록에 궁궐 여인의 미모가 언급된 유일무이한 인물이다. 그리고 숙종은 인경왕후 (첫번째 아내)가 전염병으로 죽고 힘든 날을 보내고 있던 시.. 더보기
1597년 난중일기 : 통절한 심정이 담긴 이순신의 기록 1597년 2월 26일 이순신은 의금부로 압송된다. 당시 조선수군총사령관 이순신이 압송되는 모습을 보며 백성들은 통곡을 했다. 이순신은 왜 의금부로 압송이 되었을까? 1592년 4월 13일 부산앞바다에 기습적으로 처들어온 일본군에 의해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불과 20일 만에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온 나라가 일본군에게 짓밟혔다. 그러나 조선의 바다는 달랐다. 해상에서는 이순신의 일방적인 승리로 일본 수군의 길목을 막고있었다. 이순신의 활약으로 수세에 몰렸던 조선이 한숨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남해로 일본의 정예부대를 급하게 파견하게 된다. 1592년 7월 8일 한산대첩 한반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이 벌인 전투인데 한산대첩 하루 전날 견내량이라는 곳에 외군의 배가 모여.. 더보기
연개소문과 연남생 고구려 멸망시키다. 21회 7세기 요동을 차지한 나라는 고구려로 당 태종은 유언으로 요동에 가는 것을 금지했다. 그것은 자신이 추진하던 고구려 정벌을 멈추라는 유언이었다. 당 태종은 고구려 원정에서 실패했고 그때 장수가 바로 연개소문이다. 연개소문은 누구? 연개소문은 고구려 최고 관리 대대로(고구려 국정을 관리하는 최고 관등) , 막리지(국사를 총괄한 관직) 를 역임했던 집안으로 고구려 최고 가문의 촉망받는 후계자였다. 당시 가문은 아버지의 관직을 아들이 이어받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고구려의 다른 귀족들은 연개소문의 세습을 반대했다. 그 이유는 연개소문의 성격이 포악하다는 이유였으나 사실 연개소문의 집안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연개소문 쿠데타 그래서 연개소문은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그들에게 사과를 한후 관직에.. 더보기
의순 공주 이야기 (족두리 무덤이란? ) 18회 경기도 의정부 천보산 자락에 위치한 한적한 주택가 뒤에 방치되어 있던 무덤이 있다. 이곳에는 시신이 아닌 족두리가 묻혀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무덤 아래 족두리가 묻혀있다고 믿었고 이 무덤을 족두리 무덤이라고 불렀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조선의 공주, 오랑캐의 아내가 된 의순공주이다. 청 나라 사신오다 1649년 17대 조선의 왕 효종은 아버지 인종때 삼전도의 굴욕을 겪었던 병자호란때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서 긴 인진 생활을 했다. 효종이 즉위 후 청나라에서 사신이 비밀문서를 들고 온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13년이 지나고 청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왔는데 병자호란의 여파로 청구 요구에 복종해야 했던 조선이었다. 효종은 미리 사신을 보내어 청 사신을 만났는데 청 나라 사신은 이상한 것을 묻는다. 효종의 자식이.. 더보기
우키시마호 침몰 광복 직후 무슨일이! 해방 뒷 이야기 8월 15일 1945년 8월 15일 정오 12시 경성에서는 고종의 손자 이우 장례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우는 일본에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군으로 복무 중 갑자기 사망한다. 일본에 떨어진 핵폭탄으로 인해 1945년 8월 6일 이우는 출근중이던 핵폭탄에 피폭되어 사망했다. 광복 8일전이었다. 타국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조선의 왕자 이후에 장례식이 8월 15일 낮 12시 경성 운동장에서 치러질 예정이었다. 그런데 12시에 치러지기로 했던 장례식이 미뤄지고 정오에 중요한 방송을 한다고 발표한다. 그리고 그 내용은 일황이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 항복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8월 15일은 너무 조용했다. 방송은 당시 일본 왕실에서 사용할 법한 어려운 용어들이 많이 있었고 녹음의 질..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