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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벌거벗은 한국사

장녹수 연산군의 총애를 어떻게 얻었나? 그녀의 최후는? 70 조선 왕조 10대 왕이자 폭군의 대명사 연산군의 후궁이었던 장녹수는 궁궐에 들어오기 전 기생이었다. 기생 장녹수는 어떻게 폭군 연산군의 마음을 얻었을까? 1502년 연산군 8년은 연산군의 폭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이다. 연산군은 조선팔도 춤, 노래, 미녀를 색출해 궁궐로 불러들여 음주, 가무를 즐기려 했던 것이다. 이런 가무기생들에게 '운평'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운평 중에서도 뛰어난 이들을 선별해 '흥청'이라고 불렀다. 장녹수는 운평으로 뽑히는 과정 없이 바로 흥청이 된다. 당시 연산군은 예술에 있어서 누구보다 예민한 눈과 귀를 가진 왕이었기 때문에 타고난 감수성이 풍부했던 연산군은 자신의 시집을 내기도 하고 가면을 쓰고 추는 처용무에도 능했다. 그래서 자기처럼 예술적 기질이 뛰어난 장녹수에게.. 더보기
수렴청정 언제부터, 누구 시작했나? (43-3) 이전글 : 대윤 vs 소윤 43-2 1545년 7월6일 12살 경원대군은 조선 제 13대왕 명종이 된다. 그리고 왕이 된 명종과 함께 문정왕후는 어린 명종을 대신해서 수렴청정을 하기 시작한다. 이 수렴청정의 유래는 발을 내리는 행위로 문정왕후가 처음으로 시작한 것이다. 문정왕후 이전에 처음으로 수렴청정했던 성종의 할머니 정희왕후는 직접 편전에 나오지 않고 자신의 거처에서 정무를 봤었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이전과 차원이 다른 수렴청정을 펼친다. 조선최초로 왕이 업무를 보는 편전에 나와서 국정운영을 한 것이다. 심지어 경연에도 참석했다. 그렇게 대신들과 함께 자리에서 문정왕후는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내세우며 국정운영을 주도했다. 문정왕후는 자신이 왕인것 처럼 정치 전면에 나섰다. 중종 때 수많은 사건을 겪.. 더보기
을사사화 - 정미사화 (양재역 벽서사건 ) 43-4 이전글 : 수렴청정 언제부터, 누구 시작했나? (43-3) 을사사화 문정왕후는 대윤파를 제거하기 위한 계획에 돌입한다. 대윤파의 수장이었던 윤임을 제거한 것이다. 문정왕후는 윤원형에게 윤임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라고 했고 이때 정순붕이라는 인물이 대윤파의 수장인 윤임이 역모를 꾸몄다는 상소가 올라오게 된다. 정순붕은 윤원형과 뜻을 함께 했던 소윤파의 핵심 인물로 이 상소 덕분에 문정왕후는 윤임을 유배보내고 사약까지 내리며 윤임을 제거할수 있었던 것이다. 윤임과 함께 엮였던 대윤파 역시 대부분 사사된다. 양재역 벽서사건 = 정미사화 을사사화 2년 후인 1547년 말죽거리 양재역에 괴문서가 붙게 되었다. 그 내용은 여주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더보기
대윤 vs 소윤 43-2 이전글 -> 문정왕후는 어떻게 중종의 3번째 왕비가 되었나? 김안로 추출 문정왕후에게 자식이 없다가 3명의 공주 출산 후 마침내 경원대군이 탄생한다. 그러나 인종의 세력은 경원대군을 경계하기 시작하고 이 세력의 가장 우두머리가 김안로였다. 이에 그들은 문정왕후의 남동생들인 윤원형과 윤원로가 유언비어를 퍼뜨린 하고 중종에게 고하고 중종은 윤 씨 형제를 파직하고 유배를 보냈다. 실상은 가짜뉴스로 윤 씨 형제를 내쫓으려 했던 김안로의 계략이었다. 그러나 윤원로가 중종을 몰래 찾아가 김안로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이에 화가 난 중종은 다음날 김안로를 유배를 보내고 사약을 내렸다. 사실 중종은 김안로가 세력을 키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런 김안로가 문정왕후의 측근들과 갈등을 일으키자 선을 넘었다고 생각해 이 같.. 더보기
황희 정승 이야기 42회 황희는 조선 역사상 최장기 제상에 있었고 87세에 은퇴를 했다. 1363년 고려말 황희는 개경에서 태어났는데 어릴때 부터 영특해서 읽은 건 잊지 않는 총명함으로 남들과 달랐다. 황희가 처음 관직에 오를때는 고려 32대 왕 우왕(재위 1374~1388) 시기였다. 14세~ 30세 황희는 고려 , 조선시대에 공신 혹은 고관의 자제를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를 채용하던 음서제도에 의해 관직에 14세에 나갔다. 그리고 27세에 과거에 급제한 후 성균관 학관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3년 후 실직하게 된다.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개국 후 이성계(태조)가 다시 황희를 찾았고 황희의 능력과 인품을 높이 사 직접 조선 관리로 임명한다. 그렇게 황희는 고려 우왕 창왕 공양왕에 이.. 더보기
황희 서달 살인사건 은폐하다. 이전글 서달 살인사건 황희가 좌의정 승진 전 고위 관직자의 아들 서달이라는 선비가 지금의 청주 지역인 신창현을 지나고 있었는데 마을 관아의 아전과 마주치고 아전이 자신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아전을 찾아오게 했으나 이미 그 아전은 사라진 뒤였다. 이에 서달은 다른 아전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었고 이를 말리던 또 다른 아전을 종을 시켜 때리게 했다. 그런데 그 아전이 매질에 사망한 것이다. 서달은 황희의 사위였다. 이에 황희는 신창현의 관리를 찾아가 사건 합의를 위한 청탁을 한 것이다. 그리고 서달의 아버지는 형조판서였기 때문에 죽은 아전의 가족에게 뇌물을 주며 합의를 강요한 관리들로 인해 합의서를 제출하게 되고 살인사건은 서달의 종이 저지른 일로 종결되는 듯 했다. 황희 65세에 감옥가다. 그.. 더보기
조귀인 인조가 가장 아낀 후궁 인조는 44살에 얻은 효명옹주를 애지중지했다. 인조는 효명 옹주를 아낀데는 이유가 있었다. 효명옹주 탄생 1년 전 1636년 병자호란이 있었고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고 심지어 아들 셋을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야 했던 인조였다. 27년을 함께 살았던 인열왕후도 전쟁 1년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런 어려움을 겪고 태어난 효명옹주였다. 이런 효명옹주를 낳은 사람이 조귀인이었다. 조귀인은 효명옹주를 낳기 전까지는 종4품의 숙원이었으나 딸을 낳고 정식 후궁이 된 조귀인이다. 조선 16대 왕 인조의 후궁 조귀인은 인조가 생애에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후궁이다. 조귀인은 누구? 조귀인은 효명옹주를 낳을 당시 일개 후궁이었다. 조귀인의 입궁시기는 1630년으로 인조 즉위 8년째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인조는 조귀인을 .. 더보기
김유신은 어떻게 추존왕까지 되었나? 39회 천년가까이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는 도시전체가 박물관이라 불리고 있다. 김유신 장군의 묘는 12 지신이 새겨져 있을 만큼 크고 왕릉과 같은 위용을 자랑한다. 신라의 명장이자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김유신은 가야 왕족 혈통이었다. 가야 출신 김유신 신라 진골되다. 가야는 연맹국가로 금관가야 출신으로 42년 김수로왕에 의해 세워진다. 금관가야는 가야연맹의 초기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성장한 나라였다. 금관가야의 10대 왕은 구해왕(김구해: 재위 521~532)으로 김유신의 증조 할아버지였다. 구해왕이 집권하던 6세기경 금관가야는 위기에 빠진다. 가야연맹은 적국 신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나라로 영토 확장을 위해 신라는 가야연맹을 공격했다. 구해왕은 신라 법흥왕에게 찾아가 항복을 했고 이를 받아들인 법흥왕.. 더보기
갑신정변 (김옥균 능지처참 왜?) 41-2 이전글 갑신정변 이전 상황 (통리기무아문 별기군 설치, 임오군란) 41-1 1884년 8월 베트남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프랑스사이에 청불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의 청나라 군대 절반이 빠져나간다는 것이었다. 이에 김옥균은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를 얻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것이다. 1884년 10월 17일 조선의 수도 한성 우정총국(=우체국)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우정총국은 조선 26대 왕 고종은 우편 업무를 담당하도록 세운 근대적 기관으로 10월 17일은 우정총국 설립 축하 연회날이었다. 당시 우정국 총책임자 홍영식을 중심으로 김옥균 민영익 등 조선 고위 관료들과 미국, 영국, 청나라등 각국 외교관들이 한데 모인 연회장이었다. 갑신정변 당일 정변을 계획하면서 김옥균은 .. 더보기
갑신정변 이전 상황 (통리기무아문 별기군 설치, 임오군란) 41-1 1894년 새로운 조선을 꿈꾸며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김옥균은 상하이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또한 조선으로 돌아온 김옥균의 시신은 돌아온 후 능지처참을 당한다. 운요호 사건 결과 1875년 일본의 운요호가 불법으로 강화도에 침투, 강화도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1876년 일본은 이것을 빌미로 조선에 개항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렇게 강화도 조약이 맺어지고 이에 조선은 처음으로 부산, 원산, 인천의 항구를 순차적으로 개항했다. 조약 이후 세계 열강들과도 통상 수교를 맺게 되었다. 서양 열강이 조선의 개항을 요구했던 이유는 일본은 대륙 침략의 목적이 있었고 미국은 동북아시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거점 확보, 청나라는 조선 식민지화, 러시아는 부동항 확보후 아시아 침략 계획이 있었고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목적..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