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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Here

Blue House 투어 : 청와대에 푸른 기와를 올린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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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대중에게 전면 개방된 청와대 뒤로 높이 342m 의 북악산이 위치해 있다. 사람의 얼굴을 닮아 면악 또는 백악산이라고 불린다. 큰 바위 두개가 용의 눈으로 옛날부터 전해지기로 청와대, 경복궁 터가 북악산용의 기운에 딱 맞는 곳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청와대 : 푸를 청, 기와 와, 대 대 푸른 기와

 

청와대라고 이름은 언제부터? 지은 이유 

원래 청와대 이름은 조선시대 이곳은 군사훈련 및 과거 시험을 보던 경무대로 사용되었고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가 총독 관저가 지어졌던 그 터 자체의 이름이 경무대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통령 관저이름을 경무대로 사용했었다. 그러나 이승만 독재로 인해 경무대의 이름이 정치적으로 부정적으로 바뀌게 되면서 그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윤보선 2대 대통령이 다른 대안으로 찾은 이름이 청와대였다. 

 

청와대에 푸른 기와를 올린 이유

청와대 본관의 푸른 기와는 15만장을 얹은 것이다.  이 푸른 기와는 기와를 굽고 유약을 발라서 1000 도씨가 넘는 고온에서 다시 구워야 한다. 청와대라는 이름은 '푸른 기와집'을 의미하며 푸른색은 평화와 안정, 신뢰를 상징하며 고대부터 푸른기와는 부와 번영을 상징하기도 했다. 그래서 대한민국 대통령의 관저가 국민들에게 평화롭고 안정된 이미지로 다가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고 기와집은 한국의 전통과 문화를 존중하고 계승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청기와

그러나 청와대 기와의 기원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0년대 후반 총독 관저 지붕에 청기와를 사용했었다. 130년전 전봉준의 동학농민 운동 실패 후 뿔뿔이 흩어진 동학군의 일부가 동학의 정신을 이어받은 새로운 민족 종교 보천교를 창설했다.  그러나 조선을 식민지화하던 조선총독부가 일본 종교 신도, 불교, 기독교, 천도교를 남겨놓고 이 민족 종교들을 대부분 없애버렸다. 

 

보천교

그래서 보천교의 건물과 사람들이 해산되고 철거되는 과정에서 보천교 본부의 십일전 청기와를 뜯어서 건물 일부는 조계사 대웅전으로 기와는 조선 총독 관저에 청와대 지붕 얹어 놓았다.  조선을 영구적으로 지배하고자 했던 일제는 왕의 거처를 상징하는 푸른 기와 : 청와를 총독관저에 올렸던 것이다. 

 

청와대 대정원 (본관 밖)  

국가의 귀빈을 공식적으로 맞이하는 장소, 환영행사등이 진행되었다. 청와대 본관 밖에서 바라본 뷰에는 경복궁 신무문 (북문) 이 있다. 그 옛날 조선 시대 경복궁 신무문 뒤에서는 회맹제(모일 회, 맹세 맹, 제사 제) 라는 의식이 종종 치러지곤 했다.  소와 양의 피를 받아 이 제물의 피를 나눠 마시며 충성을 다짐하는 의식이었다.  

 

청와대 대정원 회맹제가 행해졌던 곳이 청와대 대정이다.  

 

회맹 의식은 태조 이성계부터 영조때까지 이뤄졌는데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조선의 14대 임금 선조는 백성을 버리고 도망을 가 명나라로 망명을 시도한다. 7년간의 임진왜란은 이순신과 장군들의 활약으로 끝이 난다. 전쟁 후 선조는 나라를 지킨 사람들에게 훈장을 준다.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들 즉 선무공신(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무신에게 주는 훈공)과 호성 공신(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보필한 사람에게 주는 훈공) 에게 훈장을 주는데 선조를 보필했던 호성공신 86명, 전투 수행을 했던 선무 공신 18명에게 훈장을 준 곳이다. 선조의 도주를 도운 사람들 약 4배의 사람들에게 더 많은 훈장을 주었던 것이다.  호성공신 속에는 선조 임금의 말을 끌고 가던 사람들 견마꾼들 3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청와대 소정원 , 대통령 관저

소정원 청와대 소정원은 트럼프 전 대통령 부인 멜라니아 여사도 걸었던 길이 있고 사망이 뚫려있어 청와대 본관, 관저등, 모든 건물로 통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야생화로 가득하다.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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