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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동양평화론 안중근은 하얼빈 의거 이후 뤼순감옥에 갇히게 된다. 사형을 선고받은 안중근은 재판관에게 사형 집행 날짜를 미뤄 달라고 요청하고 동양 평화론을 집필한다. 그 당시 평화라는 단어는 굉장히 낯선 것으로 안중근의 평화 사상은 선진적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동양평화론은 어떻게 남아 전해졌을까? 현재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은 일본 국회 도서관이 소장 중인 동양평화론 필사본이다. 당시 사법성이라는 기관의 한 일본인 관리가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보고 감탄을 하면서 밤을 세워 필사해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인 관리의 필사본은 17쪽의 미안성으로 전해진다. 일제가 사형 집행을 미뤄 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동양평화론 내용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에는 판결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글이 아닌 이토 히로부미를.. 더보기
안중근 의사 집안에서 몇 명이 건국 훈장을 받았을까? 우리나라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안중근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항일 투쟁에 앞장섰고 하얼빈 의거로 사형을 당하고 생을 마감한 후 안중근을 만나러 오던 아내와 아이들은 끝내 안중근을 만나지 못한다. 조국에 남아있던 안중근의 가족들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져 이후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도움으로 연해주에 자리를 잡게 된다.   두 명의 안중근 남동생 안정근, 안공근은 마지막까지 안중근의 옥바라지를 했고 안중근이 사망한 이후 안중근 대신 집안의 가장 노릇을 했던 차남 안정근은 안중근의 죽음 이후 1910년 중국 상해로 향하고  도산 안창호와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 상해 임시정부의 의원으로 활동했던 안정근은 임시정부의 북간도 특파원으로 선발돼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에 나섰고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참전한다... 더보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합의 무엇이 문제인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은 국가 차원에서 인신매매를 묵과하고 있고 한일 양국의 잘못된 합의로 인해 더욱 상처가 깊어졌다.    위안부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  국제적으로 널리 쓰이는 표현은 일본군 성노예 인데 피해자분들은 성노예라는 표현으로 마음의 상처가 더욱 깊어지기 때문에 보편적인 표현은 일본군 '위안부' 이다.    세계 최초로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한 분은 고 김학순 할머니이다. 일본에서도 80년대 부터 '위안부' 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실제로 피해자들이 나왔던 것은 아니였는데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피해 사실을 알린 것이다.   일본군 위안소 시작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으로 인해 당시 일본군의 잔혹한 범죄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처음 일본군의 위안부의 시작은 난징대학살이었다. .. 더보기
잊혀진 영웅 강우규 의사 : 서울역 앞 동상 그는 무엇을 했나? 강우규 의사는 누구? 의열투쟁의 대표적 인물로 안중근을 떠올린다. 의거 당시 안중근의 나이는 31세였다. 일왕의 생일축하연에서 폭탄을 던진 윤봉길의 당시 나이도 24세였다.  그러나 적지않은 나이 65세의 나이로 의열투쟁을 했던 인물이 있다. 강우규 의사이다.    친일파 양성 사이토 마코토 1910년 한일합병이후 일순간 나라를 잃은 삼천만 조선민중은 비탄에 잠기게 되고 1919년 3.1운동이 평화적으로 전개되지만 일본은 무자비하게 총칼로 민중을 탄압했다. 이후 일본은 문화통치로 식민정책을 바꾼다. 1920년대 이 문화통치를 통해 수많은 친일파가 양성되었다. 그 시발점을 만든 인물이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었다. 그는 폭력이 아닌 교묘히 민족분열을 조장해 조선 민족을 분열시키려 했던 인물이다.   강우규 의.. 더보기
사후 세계 믿음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사후 세계를 추모하기 시작한 것은 약 1만 5천~2만년 전의 이야기이다. 이집트인들은 사후 세계의 평안을 기원하며 무덤에 부장품을 묻기 시작했다. 장례문화는 인류 진화 후반기에 발생했다. 무덤을 만든 이유 및 최초의 무덤🧠 살에서 흙으로: 무덤의 진화, 식인에서 문명까지무덤은 처음부터 종교적이지 않았다.인류는 먼저 먹고, 그 후에 묻기 시작했다.무덤의 기원은 생존, 공포, 감정, 의례, 권력의 흐름 속에서 탄jangane.tistory.com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 : 무덤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무덤이다. 죽은 사람의 집이 무덤이고 그 무덤 속에 무언가를 함께 묻는 것 자체가 사후 세계에 대한 강력한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3000년 전 청동기 시대 대표적인 무기 .. 더보기
영화 암살 전지현 모티브 인물 : 남자현을 아시나요? 남자현이 독립운동을 한 계기남자현은 경상북도 영양에서 지내온 인물로 을미사변 당시 남자현의 남편은 의병 활동을 하던 중 전투 중 사망하게 된다. 그 당시 임신 중이였는데 남편의 마지막 옷을 품고 다녔다고 한다. 남자현은 아들을 다 키우고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봉양한 후 남편의 복수를 위해 47세의 나이에 아들과 함께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했고 1919년 만주로 망명 후 독립군 부대 서로군정서에 들어갔고 서로군정서의 신흥무관학교에 아들은 입학을 했다. 이렇게 남자현은 오랜기간 준비를 했고  실제 남자현은 총을 잘 쐇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흥무관학교 1910년 한일합병 이후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와 러시아로 이주하게 되고 그곳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기관을 세우게 되는데 대표적인 .. 더보기
동의회 엄인섭 독립투사에서 밀정으로.. (15만원 탈취 의거 ) 엄인섭은 누구? 엄인섭은 동의회 소속 독립 운동가였다. 안중근 의사와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항일 투쟁의 선봉장에 섰던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였기 때문에 엄인섭의 실체를 최근까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관의 기밀자료가 공개되면서 엄인섭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1911년 부터 엄인섭이 정보를 보고했다는 기록이 발견된 것이다. 15만원 탈취 의거 엄인섭이 밀정으로 드러난 결정적인 사건은 간도 15만 원 사건이 있다. 독립자금을 구하기 위해 함경북도 회령에서 일제가 15만원(현재가치 약 150억원)을 운송 중이었고 이것을 탈취해 독립군 문기를 구입하려던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이 드러나 탈취와 동시에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된다. 이때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등이 체포가 되서 서대.. 더보기
이름없는 독립운동가 최재형 동의회, 권업회 만들다. 이름없는 독립운동가들이 많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시베리아 항일 운동의 대부로 알려진 최재형이다. 최재형은 재력가이면서 베푸는 삶을 살았던 인물이나 사실  최재형은 아버지는 노비 어머니는 기생인 노비 출신이다. 1860년대 함경북도를 덮친 흉년때 가난과 학정을 피해 수많은 한인들이 러시아로 도망을 갔다. 1869년에만 약 6000명의 조선인이 연해주로 이주했고 이에 러시아 정부는 토지를 제공, 세금 면제 등 포용 정책을 펼쳤다. 이때 러시아 학교에 입학한 최초의 한국인 학생이 최재형이었다.    \러시아 학교에서 러시아어를 익힌 최재형은 이후 배를 타며 선원 생활을 했고 생활기반을 다졌다. 최재형은 러시아 주요 도시에서 생활을 하며 통역과 군수사업으로 단기간에 부를 축적하며 출세의 기반을 다졌다.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