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썸네일형 리스트형 체코슬로바키아 혁명: 프라하의 봄 /동유럽 민주화 과정 177-5 [이전글] 헝가리 혁명 배경 결과 177-4 1964년 10월 새로운 소련의 지도자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선출되고 브레즈네프는 다시 정치적 안정을 위해 공산당 중심의 중앙 집권화를 시도한다. 헝가리 혁명과 같은 민주화 운동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공산주의 체제를 최우선시하고 동유럽에 대한 정치 군사적 조치를 강화했다. 이러한 소련의 억압에도 민주화를 꿈꿨던 동유럽의 체코슬로바키아의 알렉산데르 둡체크가 있었다. 둡체크는 1968년 1월 5일 체코슬로바키아의 제 1서기장으로 당선된다. 둡체크는 언론,표현의 자유 다당제의 가능성을 추진하며 국민들의 지지를 얻게 된다. 헝가리와 마찬가지로 경제적 침체기를 겪고 있었던 체코슬로바키아 시민들은 그의 정책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고 둡체크를 지지하는 많은 세력이.. 더보기 헝가리 혁명 배경 결과 177-4 [이전글] 스탈린식 공포정치의 상징들: 코메콘 , 나토 , 바르샤바 조약기구 창설 배경 177-3 탈스탈린화 흐루쇼프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탈스탈린화를 시행한다. 스탈린의 개라 불리는 동유럽 지도자를 청산했고 평화 공존이라는 새로운 외교 정책을 제안하며 협력하는 자세를 취한다. 그래서 동유럽 국가의 지도자들에게 어느정도 정치적 자율성을 인정해주는 자세를 취한다. 헝가리 혁명 배경 이렇게 되자 자유와 개방을 원하는 분위기가 동유럽 국가들 사이에 형성되었고 그 중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곳이 헝가리였다. 헝가리는 스탈린의 하수인이였던 마차시가 시행했던 중공업 중심의 산업으로 인해 소비재 산업이 심각하게 무너진 상태였다. 일상생활을 위한 생필품도 구하기 힘들고 심각한 식량 부족을 겪던 상황이었다.. 더보기 동유럽 공산화 과정 : 철의 장막 탄생, 냉전 시대 시작 177-2 [이전글] 알탸회담 결과 177 -1얄타회담 이후 스탈린은 소련군을 동유럽에 진군시켜 무력을 통한 통제를 시작한다. 스탈린이 동유럽 장악을 위해 가장 먼저 한 것은 동유럽에 공산당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는데 주력하게 되고 동유럽을 공산주의로 물들이기 위한 친소정권을 수립한다. 당시까지만 해도 동유럽은 공산당세력이 크지 않았었다. 그래서 스탈린은 공산당을 제 1당으로 만들기 위해 정부의 모든 분야를 완전히 장악했다. 살라미 전술 스탈린의 대표적인 전술 살라미 전술을 통해 살라미처럼 조금씩 반대 세력을 무력화해서 동유럽의 정치를 장악해 나가려 했던 것이다. 비공산주의자를 얇게 썰어서 제거한다는 의미로 헝가리의 대머리 살인자로 불리는 라코시 마차시가 언급한 전술이다. 라코시 마차시는 1944년 헝가리에 공.. 더보기 알탸회담 결과 177 -1 얄타회담 얄타회담은 1945년 2월 4일 ~11일 제 2차 세계 대전 끝무렵에 소련 흑해 연안의 얄타에서 미국 루즈벨트, 영국 처칠, 소련 스탈린 지도자들이 모여 독일의 패전과 그 관리에 대하여 의견을 나눈 회담을 말한다. 제 2차 세계 대전 끝에 소련 흑해 연안의 얄타에서 미국 루즈벨트, 영국 처칠, 소련 스탈린 지도자들이 모여 독일의 패전과 그 관리에 대하여 의견을 나눈 회담을 말한다. 1939년 9월 1일 독재자 히틀러 독일이 폴란드를 기습 침공하면서 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다. 이후 약 7천만~ 8천 5백만명이 사망하는 희생을 치러야했고 6년간 이어진 전쟁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날 무렵 크림반도의 얄타에 모여 회담을 진행한다. 얄타회담 결과 이 회담에 전후 유럽의 정세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 더보기 오키나와 전투 : 중국, 일본, 미국에 배신당하다 . 176-2 [이전글] 오키나와 역사 : 류큐 왕국이 오키나와가 되기까지 176-1 오키나와를 점령한 일본은 이후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승전국으로 강대국으로 승승장구하게 되고 아시아를 넘어 태평양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1941년 진주만을 공격, 이에 미국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며 미드웨이 해전 이후로 미국은 일본의 점령지들을 빼앗으며 일본 본토까지 후퇴시켰다. 83일간의 오키나와 전투 미국은 일본 본토 상륙을 위한 장소로 오키나와를 선택한다.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에서 약 500km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 본섬을 직접 공격하거나 봉쇄 가능한 전략적 요충지로 생각했다. 무엇보다 오키나와는 태평양 한가운데에 위치해서 타이완과 중국 어디로든 진출이 용이한 지리적 가치로 인해 일본은 .. 더보기 오키나와 역사 : 류큐 왕국이 오키나와가 되기까지 176-1 오키나와는 15세기 초까지 여러 개로 분열된 동아시아의 작은 변방의 나라였다. 하지만 중국의 영향력 아래 해상무역 강국으로 성장하지만 이후 일본에게 멸망하며 일본에 편입된다. 이후 일본을 지키는 방패로 최전선에 내던져졌고 현대에도 영토의 20%가 군사기지로 사용되며 끝나지 않는 차별과 불평을 겪고 있다. 오키나와 방언은 일본어와 완전히 다르고 외모도 이목구비가 뚜렷한 차별이 있다. 음식도 일본은 메밀 면을 사용하는데 오키나와는 밀가루 면을 사용한다. 일본의 지배를 받은 오키나와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면이 많이 있다. 일본이 되기전 오키나와는 독자적 문화를 가지며 400년 이상 독립왕국으로 번성했었다. 류큐 왕국 탄생 오키나와가 완전한 일본 땅이 된것은 불과 52년 밖에 되지 않는다. 오키나와는 본섬.. 더보기 아일랜드 대기근이 불러온 타이타닉 침몰사건: 영국의 아일랜드 병합 및 독립과정 175-4 [이전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통합 과정: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 탄생 175-3 1707년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는 연합왕국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을 탄생시켰다. 세나라의 연합왕국이 된 영국은 약 100년 후 1801년 아일랜드까지 통합을 한다. 아일랜드의 통합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1171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 시절 아일랜드는 여러 소왕국들이 있었다. 아일랜드의 소왕국들이 서로 싸우다가 잉글랜드 영주들에게 지원병을 요청했다. 이때 여러 신하들이 진출했는데 헨리 2세는 아일랜드에 진출한 신하들이 힘을 갖게 되는 것을 원치않았기 때문에 직접 아일랜드를 점령하게 된다. 이때부터 잉글랜드 국왕이 아일랜드 영지를 다스리는 '종주왕'을 겸하게 된다. 잉글랜드 종교 개혁 이후 약 360년간 잉글랜.. 더보기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통합 과정: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 탄생 175-3 [이전글] 잉글랜드로부터 스코틀랜드 독립 과정 175-2 1503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결혼을 통해 가까워진다. 당시 잉글랜드는 랭커스터와 요크 왕가 사이에 벌어진 왕위 쟁탈전 장미전쟁으로 튜더왕조가 열리게 된다. 오랜 전쟁으로 지친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와 평화를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와같은 선택을 했다. 두 나라를 다스린 제임스 1세 (동군연합) 이 결혼 이후 두 나라는 큰 변화를 겪는다. 두 나라가 국혼을 한 후 100년 정도가 지난 1603년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후사없이 사망한다. 왕조의 대를 잇기 위해 새로운 왕을 찾게 되었고 마거릿 튜더와 결혼한 제임스 4세의 후손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모두의 혈통을 지닌 제임스 6세였다.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로 가서 스코틀랜드.. 더보기 이전 1 2 3 4 ··· 6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