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에 가면 독립기념관이 있는데 1982년 일본이 역사 교과서를 왜곡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초.중.고 역사 교과서에서 한국 침략을 진출로 독립운동 탄압을 치안유지 도모로 토지 약탈을 토지소유권 확인으로 표기하는 드의 왜곡된 역사를 기술했던 것이다. 이에 대대적으로 반일운동이 일어났고 우리나라 국민이 성금을 모금해 독립기념관을 건립하게 되었다.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기 전 대한제국에는 지금의 헌법과 같은 대한국국제라는 것이 있었다. 여기에 대한제국의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지가 쓰여있다.
3.1 운동 의의
제2조 대한제국의 정치는 500년 전래하시고 만세에 걸쳐 불면하오실 전제정치이니라 .. 이것의 의미는 조선의 모든 것은 황제에게만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백성들한테는 주권이 없다는 거다. 황제의 권한은 그냥 일본 황제에게로 이양이 되었고 이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때부터 독립 투쟁을 시작한 셈이다. 그래서 1919년 기미독립선언서에는 우리는 이에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는 내용을 시작으로 대한제국의 복원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는 자유민이고 독립국인 것을 선언한 것이다. 독립투쟁은 즉 국민 주권 투쟁인 것이다. 이러한 국민의 요구를 받아들여 임시정부에서는 민주 공화정을 내세우게 된 것이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인 이유는 임시정부, 그리고 3.` 운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3.1 운동이 대한민국의 시작인 것이다.
3.1 운동 배경
1919년 기미년 민족 대표 33인의 독립선언 이후 전국 방방곡곡의 젊은이들,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기미독립선언서를 복사해서 나눠주고 전국에서 열리는 오일장 장터들을 돌아다니면서 집회를 이끌어나간다.
3.1운동은 일본 침략 위기의 중국이었다. 우리의 3.1 운동을 보고 자극을 받은 중국 청년들들이 일으킨 5.4 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 이렇게 조그만 나라에서 맨손으로 저항한 우리민족이었다. 그러한 3.1 운동의 정신이 촛불 시위에도 계승된 것이다. 3.1 운동은 태극기를 들었고 촛불 시위는 우리의 문제였기에 촛불을 들었던 것이다.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은 4월 1일이었다. 독립선언을 한 3.1일부터 한달 후이다. 1919년 3.1 운동, 1960년 4.19 혁명, 1980년 5.18 민주화운동 , 1987년 6월 항쟁까지 양상이 똑같다.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국 각지로 퍼진다. 당시 서울에서 이화학당을 다니고 있던 유관순 열사는 자신의 고향 아우내로 만세운동을 하기 위해 떠난다. 고향에 내려가 서울을 소식을 전하고 만세 운동에 관해 설명하면서 이를 주도했던 유관순 이다.
3월 31일 밤 뒷산에 올라가서 내일 오일장에서 거사를 한다는 표시의 봉화를 올린다. 그리고 다음날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다. 3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니 일제 헌병들이 총검으로 19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유관순 열사의 부모님 두 분도 이날 시위현상에서 순국하셨다. 유관순 열사는 주도자로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옥중에서도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다 고문에 의한 장 파열로 순국한다. 그때 유관순의 나이가 만 17세였다. 18세의 생일을 맞이하지 못하고 순국한 것이다. 고 2,3 학년 때이다.
아우네 장터 만세운동은 그렇게 특별한 운동이 아니였다. 시골 장터에서 일어난 많은 만세운동의 하나였으나 이곳이 특별해진 이유는 유관순이라는 인물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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