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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논개의 흔적을 찾아서

논개의 영정도는 쫌 잘 못 그린 듯 당시 논개는 19살정도 되던 나이였다.

논개에 대한 1차 사료가 거의 없다. 논개가 처음 문서로 기록된 것은 유몽인의 <어우야담> 이 최초 기록이다. 19세기 들어서면서 논개가 기생이 아니라는 얘기가 있는데 전라북도 장수 사람이고  논개의 성은 주씨로 진주성을 지키러 왔던 의병장 최경회 장군의 후처였다는 설이 있다.논개는 1차 전주성 전투 직전에 왔다.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최경회 장군이 사망하자 논개는 바위 끝에 선다. 

왜군 장수 하나가 접근을 하게 되고 이에 주논개는 그 왜장을 껴안고 강물로 뛰어들었다는 얘기가 있다. 논개가 기생이였는지 기생인 척을 했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당시 진주 시민들이 논개 이야기를 믿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의암 논개가 뛰어내린 자리

지금은 댐이 건설되어 유속이 많이 느려졌으나 옛날에는 당시 6월에 장마철이라 유심이 깊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진주교 아래를 보면 금장식의 동그란 것이 있다. 이것은 논개가 외장을 품고 물속에 빠져들어갈때 손가락이 풀리지 않게 하기 위해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꼈다는 이야기의 황동가락지 상징이다. 

 

 

남북을 통털어 일개 기생에게 사당을 지어준 것은 논개가 유일하다. 조선 시대 여성을 기리는 일은 기생임에도 나라의 영웅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녀를 기리기 위해 제사를 지내왔다는 것이 특이하다. 진주성에서 벌어졌던 6만여명의 살육 현장에 남녀노소 각자의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다. 논개의 이야기는 국가주의 영웅보다는 전쟁의 피해자이자 희생자로써 그 시대의 비극이었던 이야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