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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한산도 전투 (견내량에서 무슨일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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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7월 당시  경상도 웅전 앞바다에는 일본 수군 3개부대가 정박해 있었다.  일본군은 육지에서 부산에 상륙해 한양까지 계속 북으로 진격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계속된 전승을 이어가고 있었다. 육지에서의 병창 보급은 한계가 있어서 결국 바다를 통해 수륙 병진 작전을 도모하게 된다.

 

통영시 미륵도 한가운데는 미륵산이 솟아있다. 임진왜란 당시 미륵산에 피란해 있었던 김천손(당포진 소속 말을 돌보는 직책의 인물) 는 미륵산에서 적의 동태를 목격하게 된다.
김천손은 견내량에 매복해 있던 일본 함대 70여척이였다. 적의 위치와 규모까지 알아낸 결정적 제보였다.

 

견내량 전투에서 전라우수영, 경상우수영, 전라좌수영의 3부대가 연합해서 출전하게 된다. 견내량에서 조선수군을 기다리고 있던 인물은 와키자카 야스하루였다. 특명을 받은 장수 3명 중 한명이었는데 와키자카는 단독출전을 감행한 것이다. 한달 전 경기도 용인전투에서 1600여명의 일본병력으로 조선군 5만명을 격파했는데 이 전투에 와키자카도 참전을 했다.  육지에서 대승을 경험한 와키자카는 자신의 성과를 히데요시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명심에 홀로 출전을 했다. 

 

와키자카는 견내량에 매복해 있었다. 이곳은 폭이 좁고 앝았고 암초도 많은 곳이었다. 이순신은 일단 5척의 배를 견내량으로 보냈다. 이를 본 일본군은 바로 공격을 했고 조선군은 다시 재빠르게 퇴각을 했다. 이에 일본군은 조선수군의 배를 뒤쫓기 시작한다. 

 

 

이렇게 왜적의 배를 한산도 앞바다까지 끌고 나오게 된다. 이때 거북선이 등장한다. 쇠못이 잔뜩 박힌 귀선을 보고 왜선은 놀라게 되고 

 

학익진 전법 : 적이 측면으로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한 전법

당시 일본군은 백병전을 펼쳤는데 거북선은 조선군의 배에 올라탈수 없는 구조였기때문에 이날 63척의 왜선이 파괴되었으나 조선수군의 배는 한척되 파괴되지 않았다. 완벽한 승리였다. 

 

이날 와키자카 부대는 전투에서 갓갓으로 살아남아 인근섬으로 도망쳤다. 해조류를 먹으며 버티다가 간신히 탈출했다. 한산전투는 도요토미 시히데요시가 사활을 건 전투였다. 빠르게 북상하던 육지 병사에게 군수품을 보급하기 위해서는 서해진출이 반드시 필요했다.

 

 

안골포 전투 

와키자카와  가토요시야키는 안골포에 숨어 서해 진출을 엿보고 있었다. 이곳에 숨어 적어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견내량에서 북동쪽으로 30여km 떨어진 안골포

 

조총의 사거리가 약 0.2km 정도였고 조선의 화포 사거리는 1.5km였다. 이에 원거리에서 조선배 두척이 번갈아 포격을 가했고 일본 정규수군 3 부대를 모두 격퇴한 한산대첩의 완승이었다. 

 

 

 

그러나 앞서 7번의 전투에서 이순신은 모두 승리했고 히데요시의 직속 수군과 맞서싸워 그들을 괴멸시켰다. 이 전투로 임진왜란의 전쟁의 흐름이 바뀌게 된다.  임진왜란 7년동안 한번도 바다를 빼앗긴적이 없는 장군이다. 

 

거북선 구조 및 판옥선, 거북선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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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해전에서 유명한 배는 거북선이지만 실제 해전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한 배는 판옥선이다. 거북선과 판옥선은 기본적으로 구조는 동일하다. 거북선의 특징은 튼튼한 덮개가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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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명량해전 금신전선 상유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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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금신전선 상유십이'란?이순신 장군이 남긴 이 유명한 말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는 한문 그대로 해석하면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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