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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History/art&culture

피카소 게르니카 작품 해설 및 역사적 배경

[이전글]  게르니카 폭격 이야기 

 

게르니카는 스페인 북쪽에 있는 도시 이름이다. 게르니카를 그렸을 당시 피카소의 나이는. 1937년 56 세였다.  한달 만에 완성한 그림이다. 이 그림은 폭 8m 높이 3.5m의 거대한 작품이다.  

 

6주만에 그린 그림

 

역사적 배경 

스페인은 전성기를 지나 급격히 쇠락하면서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에서 패배했고 뒤늦은 산업화와 경제 대공황의 위기등으로 힘들었다. 공화국에서 왕정복고 등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를 겨쳤고 1931년 좌파연합의 선거 승리로 제2공화국이 선포된다.  1931~1936년까지 학살,암살, 폭력이 빈번하게 발생했고 40여 차례의 쿠데타로 극심한 혼란과 분열이 지속되다가 결국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한다.  

 게르니카는 바스크 인근에 위치한 도시로 스페인의 대표 산업도시 빌바오가 있었다. 국민전선이 장악한 북서부 일대 그 중에 유일하게 인민전선을 지원한 빌바오 지역이 있었다. 게르니카는 인민전선에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주요보급로였고 게르니카 장악을 통해 북서부 전체를 차지하려 한 국민전선이었다.  

 

 

 

 

 

 

1937년 4월 26일은 스페인 게르니카의 장날이었다. 폭격으로 인해 마을의 80%가 파괴되었고 남자는 전쟁에 나가있는 상태로 대부분 여자와 아이들만 있었다.  

 

스페인 내전 속 게르니카 폭격과 대학살에 대한 분노가 들끓었고 프랑스에 있던 피카소에게는 자신의 조국에서 일어난 대학살에 큰 충격을 받았다. 피카소는 당시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 출품작을 그리던 중 게르니카 지방 폭격 소식을 듣고 주제를 바꿔 새로운 작품을 완성했다. 이것이 바로 피카소의 역작 게르니카이다. 이 그림에 는 피 한 방물 등장하지 않지만 전쟁의 온갖 비극을 나타내고 있다.  

 

피카소 게르니카 작품
피카소 게르니카 작품/  도라 마르의 영향을 받아 흑백으로 그려졌다


 
게르니카 그림 분석 

게르니카 그림속 산산조각이 난 부러진 칼을 쥐고 있는 사람은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의미 , 가난한 농촌 마을 게르니카에서 희생당안 말과 소는 그들의 전 재산을 폭격으로 잃게 됨을 의미, 죽은 아이를 안고 슬퍼하는 어머니의 모습, 피에타를 연상시키고 아래쪽은 사망한 군인 또는 희생자들 의미한다.  

 

사망한 군인 희생자들
사망한 군인 희생자들
죽은 아이를 안고 절규하는 여인은 피에타에서 영감을 받았는 설/ 자신의 마리 테레지와 자신의 아이를 그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른쪽에는 화염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보인다. 위쪽에는 전등하나가 보이는데 공습경보를 알리는 사이렌을 연상케한다. 말의 입쪽에는 총알같은 것이 보인다. 말은 전쟁으로 고통받는 민중을 상징하며 황소는 스페인을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하고 전쟁의 폭력성을 상징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도 황소가 미노타우르스가 권력등을 상징하는 것과도 같다.

 

화염 속 고통받는 사람들
화염 속 고통받는 사람들 속 오른쪽 끝 피카소의 5번 뮤즈 도라 마르도 그려 넣었다.


게르니카 그림은 색이 없는 무채색이다. 게르니카 폭격을 처음으로 신문의 흑백사진을 통해 접해 그 때의 충격을 담고 싶었다는 설과 화려한 색채는 메시지 전달에 방해가 된다는 설도 있다. 죽어가는 아이를 잡고 울부짓는 여인의 눈물을 붉은색으로 칠하려 했으나 그림과 어울리지 않아서 무채색으로 칠했다고 한다. 전쟁의 공포를 무거운 색채로 표현했다고 볼수도 있다.  

무채색으로 그린 게르니카
무채색으로 그린 게르니카


게르니카를 발표한 후 주변의 반응 
당시 이 그림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가해국가 독일은 “ 초등학교 사 학년이면 누구나 그릴 수 있는 인체 부분의 잡동사니.” 라고 표현했고 스페인 정부(인민전선) 도 게르니카 학살을 부르주아한 그림이라고 했다. 그러나 파리 만국 박람회에 공개된 후 많은 주목을 받았고 그후 전 세계 분쟁지역에서 순회전을 개최했다. 나치는 그림을 폄하했으나 눈엣가시같은 게르니카 그림을 불태우려했었다. 이 그림은 나치를 피해 뉴욕현대미술관에 가게 되었다.  

 

 

 

 

 

 


1973년 피카소는 사망하기 전 유언으로 “스페인이 민주화되기 전에는 내 그림을 고국에 보내지 말라“고 했다. 프랑코 사망 후 스페인으로 돌아온 피카소 그림이다.  이 그림은 전세계에 게르니카의 비극을 알리게 된다.  이 그림은 지금까지도 참혹한 전쟁과 희생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여겨졌고 이후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상징하는 작품으로 자리매김 한다.  

 

 

반전 메세지를 담은 게르니카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통해서 전쟁과 평화의 메세지를 전하려고 했다.  그래서 지금도 세계평화를 담당하는 UN안전보장이사회 회의실에는 피카소의 태피스트리(실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 가 걸려 있다. 

 

UN안전보장이사회 회의실에는 피카소의 태피스트리(실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
UN안전보장이사회 회의실에는 피카소의 태피스트리(실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
UN안전보장이사회 회의실에는 피카소의 태피스트리(실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
UN안전보장이사회 회의실에는 피카소의 태피스트리(실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



반전의 메세지를 담으려고 할때 게르니카는 다시 그려지는데 최근 우크라이나에도 다시 게르니카가 그려졌다. 멕시코의 화가가 전쟁의 폭격을 맞은 곳에 게르니카를 다시 그려넣었다.

 

전쟁 폭격을 맞은 곳에 게르니카 그림을 그림
전쟁 폭격을 맞은 곳에 게르니카 그림을 그림
전쟁 폭격을 맞은 곳에 게르니카 그림을 그림
게르니카는 반전 메세지를 전하는 상징이 되었다.
게르니카는 반전 메세지를 전하는 상징이 되었다.

[예썰 30회/벌새 117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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