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읍성 가야의 흔적
부산 동래읍성은 왜구의 침입을 대비해 고대부터 있던 읍성이다. 동래읍성의 규모는 서울의 사대문 안처럼 부산 동래구의 넓은 지역을 포함한다. 조선 후기에 증축해 넓어진 성곽의 모습만 남아있다. 북문 주변으로 성곽 복원이 잘되어 있어 그 풍경도 아름답다.
제주도에 가면 망자의 넋을 구분하고 동물침입들을 막기 위해 무덤을 돌담으로 쌓는 풍습인 산담이라고 있다. 그곳과 비슷한 모양의 사각형 지형이 동래읍성 북문에 있다.
1969년에 복천동에서 금관가야 시대의 무덤들이 발견되었다. 가야 고분의 발굴 조사는 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는데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이 많이 와서 판잣집을 많이 짓고 살았다. 새로운 집을 지으려고 땅을 팠는데 도자기들이 많이 나와서 그 지역을 보존하여 뒷 세데에 더 좋은 기술이 나오면 발굴을 하기 위해 무리하게 발굴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가야국이란?
가야국은 백제와 신라 사이에 있던 부족국가로 영호남 충청도에 위치해 있었다. 초기에 인간 사회는 씨족 (같은 조상)단위에서 부족 단위로 발전하면서 조금 더 효율적인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그 일대를 통합해 가는 것 같다. 김유신 장군도 가야 왕국 후손으로 그의 아버지때부터 신라의 군인이었다.
임나일본부설이 허구인 이유
고구려, 신라, 백제가 부족 국가들을 통합해서 나라를 만들었기 때문에 삼국 위주의 역사가 쓰여져 가야는 저평가 되었다. 또한 일본은 4~6세기 200년간 가야 일대를 지배했다고 주장하면서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임나일본부설을 내세웠다. 그러나 가야의 독창성과 금속공예술을 잘 보여주는 당시의 다른 지역에는 없던 높은 수준의 토기들과 금관들이 많이 출토되었고 특히 갑옷이 나온 것이 중요한 포인트인데 일본에서 한반도 남쪽을 자신들이 점령했다고 주장했는데 그때 주장했던 증거가 갑옷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가야의 갑옷이 출토되면서 독자적인 갑옷 문화가 있었다는 증거가 됐다. 수준이 앞선 갑옷, 마구, 토기 등의 발견을 통해 임나일본부설은 허구로 판명되었다.
일본은 일본의 고대역사서 <일본서기>를 근거로 해서 주장한 것인데 이 책은 주석은 있지만 근거가 매우 빈약한 책으로 정식 역사서로 인정하기 어렵지만 일본은 이것이 최초의 공식 역사 기록이기 때문에 여기 나와있는 내용을 근거로 해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한 것이다. 일본은 자국의 역사 우수성에 대한 집착이 매우커서 후지무라 신이치가 2000년까지 20년간 유물 발굴을 조작하기도 했다.
▼후지무라 신이치의 구석기 유물 발굴 조작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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