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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벌거벗은 한국사

이성계 위화도 회군의 다양한 시선 및 고려말 상황 (벌거벗은 한국사 1회)

고려말 사회 상황

 

권문세족 횡포
고려의 최상위층 권문세족은 이성계가 동북면 출신이라는 점과 이성계 집안이 원나라의 관리로 오랫동안 원나라에서 일했던 과거사를 들어 이성계와 권력, 부를 나눠가질수 없다고 생각한다. 당시 권문세족의 횡포는 극에 달하던 시기로  권문세족은 불법적으로 토지를 강탈 및 독점을 일삼았다. 좋은 땅을 보면 땅주인을 때려서라도 토지를 강탈했다.

 

 

산천위계/국지불급
당시 권문세족이 소유한 땅을 고려사에는 '산천위계'로 언급했는데 이말은 산과 강을 경계로 삼아 토지를 소유함을 이르는 말이다. 문제는 정작 농사를 지을 농민은 송곳 꽂을 땅조차 없었다. 이렇게 권문세족의 횡포로 인해 민심이 극에 달해 나라가 부패하고 백성들의 고통이 극에 달해 '국지불급' 나라이되 나라가 아니다로 '이게 나라냐'는 말이 팽배했다. 



신진사대부 등장
이를 막기 위해 공민왕과 함께 권문세족에 맞설 개혁 세력으로 신진사대부가 떠올랐다. 신진사대부는 고려 말 성리학을 공부한 유학자들로 권문제족에 대항해 새롭게 부상한 정치세력들로 이 중심에 정몽주가 있었는데 당시 정몽주가 참모로 있던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연달아 패배하고 있는데 고려를 구하기 위해 이성계가 등장한 것이다. 

 

이성계의 모습을 묘사한 정몽주 시


이때부터 정몽주는 이성계에게 학자들을 소개하며 활발히 교류를 했다. 

공민왕 암살
당시 중국은 원나라의 힘이 약해지고 명나라가 세력을 확장하던 원명 교체기였다.  이때 공민왕은 친원파 권문세족을 청산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374년 9월 개혁의 주체였던 공민왕이 암살된다. 공민왕의 뒤를 이에 10살 우왕이 즉위하게 되고 다시 권문세족이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권문세족의 실세였던 이인임은 우왕의 옆에서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고려의 신진사대부의 또 다른 핵심인물 정도전이 있다.  정도전은 고려 개혁을 넘어 새로운 나라를 꿈꾼 인물이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친구 사이로 정몽주로부터 이성계를 소개받게 되고 정도전을 만나러 온다. 이렇게 세사람이 만나면서 전장을 누비던 이성계는 정치를 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권문세족을 제거할 기회가 찾아온다. 

 

염흥방 사건
이인임의 최측근 염흥방이 사고를 친다. 염흥방의 노비가 조반(고위관료)의 땅을 빼앗는다. 이에 노비를 죽이고 조반이 관청에 자수하면서 권문세족의 횡포를 고발한다. 이에 더이상 권문세족의 횡포를 참을수 없던 우왕은 염흥방과 가족들을 참수하라고 명령한다. 이 사건에 연루된 권문세족 재산은 몰수되고 친인척 및 노비까지 죽임을 당하는데 그 수가 대략 약 1000여명이었다.  

 

 

 

이때 여론은 이인임도 죽여야 한다고 했으나 최영의 도움으로 이인임은 목숨을 부지하게 된다. 이인임이 유배지도 떠나던 날 이인임은 최영에게 이성계가 왕이 될 것이라는 마지막 경고를 한다. 그러나 최영은 이를 흘려들었다. 

명나라의 요구
1380년 원나라 대부분을 차지한 명나라는 고려에 공민왕때 되찾았던 예전에 원나라에 빼앗겼던 철령이북 지역을 다시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소식을 들은 우왕와 최영은 명나라를 꺽고 고려의 영토까지 되찾자는 요동정벌을 주장하고 원과 명나라를 여전히 전쟁 중이였기 때문에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성계의 사불가론
그러나 요동정벌을 반대한 인물이 정몽주로 그는 친명파로 외교적 해결을 주장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우왕와 최영은 흔들리지 않고 요동정벌을 반대했던 문신들을 처형한다. 이때 이성계를 부르게 되고 이때 이성계는 4가지 이유를 들어 요동정벌을 강력히 반대한다. 



위화도 회군을 했던 이유

이성계가 사불가론을 얘기한 그날 밤 최영이 우왕을 찾아가서 요동정벌 강행을 요구하고 다음날 우왕은 마음을 바꿔 요동정벌을 강행하라고 지시한다.  이에 이성계는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에 도착한다.  그러나 당시 장마로 불어난 불에 강물이 불어나서 강을 건널 수 없게 되었다. 물에 빠져 죽은 병사만 수백 명이였다.  장맛비에 군량은 상해서 썩어가고 비에 젖은 갑옷은 행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군사들의 사기는 떨어졌고 탈영병도 속출했다. 악조건 속 위화도에서 고뇌에 빠진 이성계는 결국 최영에게 군의 상황을 알리고 다시 사불가론을 적어 보낸다. 그러나 요동까지 가면 이길거라 예상했던 최영은 군사들에게 재물을 보내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보름이 시간이 흐르게 되고 돌아가면 역적으로 몰려 가족까지 죽게 될 상황이었음에도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회군 결정에 다른 지휘관도 동의했고 음력 1388년 5월 22일 말머리를 돌려 개경으로 향했다. 

 

최영 제거
이 소식을 들은 우왕과 최영은 숨었으나 쉽게 발각이 되고 향년 73세의 나이로 유배지에서 최영은 처형당한다.  그리고 최영은 마지막 유언을 남긴다.

 

 

 

최영의 무덤
최영의 무덤에는 오랫동안 풀이 자라지 않고 붉은 흙으로 덮여 있어서 '적분'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변방의 무사로 고려를 위해 싸웠던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의 군사권을 장악하게 된다. 

위화도 회군에 대한 다양한 시선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를 죽이려한 의도적 함정이었다. ? 
최영의 함정이라는 실제기록이 있는데 연려실기술 기록에 보면 이성계가 요동정벌에 실패한다면 책임을 물어 제거가 가능하고 정벌에 성공할 경우 이성계 세력의 약화 시킬수 있다. 고 기록되어 있으나 최영의 성품을 봤을 때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

두번째는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의 예정된 계획이었다. ?

그 근거로 위화도 회군 소식을 듣고 동북면에서 이성계의 가별초가 합류한다. 개경에 이성계는 6월 1일 도착했고 가별초는 6월 2일 도착했다. 가별초가 백두대간을 뜷고 이성계 일행과 합류하려면 11일 안에 소식을 듣고 개경까지 도착해야 하는 상황인데 날짜가 도저히 맞지 않는 상황이다. 이는 미리 반역 계획을 철저히 공유했을 가능성이 있다.

 



권력을 장한한 신진사대부는 권문세족에게 수탈당한 토지를 백성들에게 돌려주고 억울한 노비들도 해방시켰다.  이후에 명나라에 이성계의 즉위와 조선의 건국을 알린다. 음력 1393년 2월 15일 옛 조선을 계승하며 국호를 조선이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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