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원짜리 지폐속 인물 퇴계 이황이다.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정치가 300명이 넘는 유학자를 길러낸 교육자이다. 퇴계 이황 얼굴 뒷쪽 건물은 조선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이자 업무를 봤던 건물이고 공부를 했던 곳인 성균관이다. 성균관은 엘리트 관료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자 성현의 위퍠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의례의 장소이다. 천원 지폐권 속의 건물은 성균관 안에 있는 강의실이라고 할 수 있는 명륜당이다.
성균관의 뜻
아직 성취하지 못한 것을 이루고 가지런하지 못한 것을 고르게 하는 기관이라는 뜻이다.
성균관의 기능
성균관에서는 공자의 사상인 유학을 배웠다. 공자는 (기원전 551~479) 세계 4대 성인이자 유교의 창시자로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할 성품으로 인과 예를 강조했다. 그래서 유교의 핵심은 인(사랑) 과 예 (예절)의 정신이다. 또한 제사의 기능도 있어서 교육의 상징 공자를 비롯해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들의 제사를 지냈다. 성균관은 교육기관인 동시에 성현의 제사를 지내던 사당(대성전)의 역할도 했다.
성균관이란?
성균관을 다니는 학생들을 성균관 유생이라고 불렀고 조선의 근본이되는 유학을 가르치는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이 성균관이다. 당시 조선의 국립대학교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대학은 서울에만 있고 제일 좋은 유일한 교육기관이었다. 한나라의 세자도 입학했던 교육기관이다. 정원은 전국 200명만 뽑았다.
왕세자입학도
문조(효명세자)가 9세 때 성균관에 입학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당시 왕과 왕세자의 얼굴을 그릴수는 없어서 왕세자의 자리만 그려 놓은 그림이다.
아무리 왕에 오른 왕세자일지라도 스승앞에서는 제자로서의 예를 갖춰야 했기때문에 스승은 책상에 책을 놓고 제사는 바닥에 책이 놓여있다.
왕은 평소에 입던 곤룡포(군주와 후계자인 세자가 착용하던 웃옷) 를 벗고 학교 성균관에서 청금복이라는 성균관 유생들이 입었던 교복을 입고 있다.
성균관 입학 방법
성균관의 대표적인 전형은 과거시험이었다. 과거시험은 문과-소과 (오늘날 수능), 대과(공무원시험)로 나뉘는데 소과를 통화한 200명의 합격자만 성균관에 입학했다.
소과인 진사시,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들의 진사, 생원이라고 불렀고 이들은 성균관 입학자격이 주어졌다. 성균관 입학 후에는 대과를 준비했다. 대과 시험을 합격하면 고위관료로 진출하게 된다.
성균관 혜택
먹고 자는 것은 무상 제공되었고 유생들을 돕는 노비까지 제공했다. 당시 노비를 반인이라고 불렀고 성균관에 소속된 노비로 유생들을 보조하는 역할을 했다. 유생들을 모시는일은 물론 강의실 청소, 따뜻한 세숫물까지 준비했던 반인들이다. 무엇보다 스폐셜한 것은 당시 고위직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자체 시험인 '관시'라고 해서 대과 초시 중 성균과 유생들에게 합격인원을 배정되어 있거나 과시라고 성균관 유생들이 주로 응시하는 특별시험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출세에 뜻이 있던 선비들은 성균관에 들어가려고 노력했다.
당시 성균관을 다니던 유생들은 평균 연령이 30대 정도였고, 40, 50대도 있었고, 심지어 60대 이상의 유생들도 다녔다.
신입생 환영회 신방례
신입 유생들의 신방례는 너무나 혹독했다. 선배들은 합격축하를 빌미로 신입 유생의 집에 처들어가서 잔치를 벌일 것을 요구 그 비용을 감당하지 못한 유생 중에 성균관 입학을 포기한 사람들도 있다. 나라에서도 이런 사태를 인지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신방례의 혹독함에 마음고생을 너무 많이 했던 율곡 이이가 있다.
율곡 이이(1536~1584)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자 정치가로 13살에 진사시 초시를 통과한 천재학자이다. 율곡 이이가 성균관에 입학하자마자 선배들의 놀림을 당하게 된다. 그 이유는 율곡 이이가 불교에 심취했었다는 이유였다. 어머니 신사임당이 돌아가시고 1년 동안 절에 들어가서 마음을 달래며 수양을 했다. 당시 조선은 숭유억불 정책이었다.
원래 성균관에 입학하자마자 공자의 초상이 있는 대성전에 들려 공자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려야 했다. 그러나 율곡이이가 공자에게 인사를 하려고 하자 성균관 유생의 장의 민복이 이이를 중=스님이라고 흠을 잡아 공자를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성균관 유생의 하루
북소리와 함께 성균관의 기상 및 아침이 시작된다. 두 번째 북소리에 새벽 공부가 시작, 세 번재 북소리와 함께 식당으로 향하고 식당에서 출석체크를 했다. 아침 저녁 하루 두번 출석=1점 부여 꼬박 300점을 채워야 특별시험을 볼수 있었고 이들은 자기주도적 학습 , 각자 시간을 정해 스스로 공부했던 유생들이었다. 선 예습후에 선생님께 후 확인 , 질문, 선생님과 학생 간의 토론으로 진행되었다. 성균관은 매일 시험을 치렀다. 일강(매일) 순제(열흘) 월강(월말) 절일제(1,3,7,9월) 등 매일매일 시험을 치렀다.
황감제
익어서 빛깔이 누렇게 된 감귤로 탐라(제주)에서 올라오는 진상품 귤을 시험에 장원하면 임금이 직접 하사하는 시험이었다. 시험의 결과는 연말에 합산 우수자는 하급관리로 임명되거나 대과 급제에 해당하는 혜택이 부여되었다.
성균관에는 어떤 건물이 있었나?
명륜당
인륜을 밝히는 장소 라는 뜻의 유생들이 수업을 듣던 강의실
명륜당 서쪽에 위치한 서재 , 동쪽에 위치한 동재 특히 동재에는 약방을 투어 지친 유생들의 몸을 돌보았다.
공자의 제사를 지내던 대성전
도서를 보관하던 존경각
과거시험 경쟁률
대과는 초시, 회시, 전시의 총 세번의 관문을 넘어야 했고 3년에 1번 있는 시험이었다. 3번에 한번 단 33명이었다. 11000: 1 의 경쟁률이 있던 해도 있다. 1800년 정조가 특별 대과 시험을 열었고 이때 단 10명만 뽑았다.
성균관의 자랑이던 성균관의 자랑 퇴계 이황도 젊은 시절에는 과거 시험을 3번 연속 떨어졌다. 그 이후 28세 소과 시험 합격, 34세 대과 시험 합격했을 만큼 치열한 경쟁과 시대를 초월하는 시험 스트레스였다.
당시는 과거에 급제하지 않으면 출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던 시기로 아버지가 아무리 높은 관직이나 집안이 좋아도 본인이 과거에 합격하지 않으면 고위관직으로 올라갈 방법이 없었다. 과거 합격만이 출세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과거 시험 최고령 합격자의 나이는 90세도 있었다.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고 성균관의 기능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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