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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벌거벗은 한국사

연산군 ! 조선 역사상 유례없는 잔악한 형벌을 가했던 군주 (2회)

연산군 어린시절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 
조선의 9대왕 성종은 역대 왕 중에서 경연을 가장 많이 했던  왕으로 재위기간 동안 8000회가 넘는다. 성종과 중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난 적장자로 연산군이 태어났다.

 

1대~9대 임금 성종의 아들 연산군까지
9대 임금 성종의 아들 연산군

연산군의 어머니 폐위
그러나 1479년 6월 1일 중전 윤씨의 그날 성종은 다른 후궁의 처소로 갔고 이에 중전 윤씨가 용안에 손톱자국을 냈고 성종은 바로 다음날 윤씨를 폐서인으로 만들어 궁에서 쫓아낸다.  그리고 3년 후에 폐비 윤씨를 사약을 내려 죽인다. 연산군이 7살 되던해 성종 13년의 일이다.  

 

성종의 용안에 낸 상처로 사약을 받은 폐비 윤씨
성종의 용안에 낸 상처로 사약을 받은 폐비 윤씨 


그러나 연산군은 어머니의 죽음을 알지 못했고 3번째 왕비 정현왕후가 친어머니인 줄 알고 자란 연산군이었다. 폐비 윤씨가 죽고 그 다음해 연산군은 세자로 책봉된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자세한 상황을 알지 못했다. 

 

 

 

 

연산군 어린시절 이상행동
사실 연산군은 어릴때부터 조금 이상했다. 공부를 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어느날 성종이 아끼던 사슴이 있었는데 이 사슴이 연산군을 핧았는데 손을 핥자 그 사슴을 발로 차버린다. 또 하루는 할머니 소혜왕후에게 술을 올리던 자리에 연산군이 빠졌는데 연산군을 데리갔던 궁녀에게 연산군이 한말.

 

 


그리고 1494년에 성종이 사망하고 당시 19세였던 연산군은 마침내 왕이 된다.  그런데 왕위에 오르는 그날 연산군은 충격적인 일을 버린다.  바로 아버지 성종이 아끼던 사슴을 죽여버린 것이다. 

 

 

연산군 재위 초기

 

그러나 연산군의 재위초기는 순탄하지 않았다. 장수와 명복을 비는 불교식 제례 수륙재에서 관례대로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의 수륙재를 시행하려 했으나 그러나 삼사가 반기를 들었다.  유교를 중시하던 성종에게 불교식 제례는 맞지 않는다고 해서였다. 연산군은 점점 삼사에 대한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고 연산군 즉위 4년 후 연산군은 자신에게 사사건건 반기를 드는 신하를 제거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무오사화
1498년 7월 17일 삼사가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손에 철쇄를 든 군사들이 갑자기 급습했고 관료들을 무자비하게 끌고 갔고 무오년에 선비들이 화를 입은 사건이라고 하여 무오사화이다. 이것은 조선 최초의 사화로 연산군때 일이다 

-발단 
무오사화의 발단은 사초에서 시작된다. 실록의 기본 자료가 되는 사초에서 문제가 되는 내용이 발견된다. 
세조(연산군의 증조할아버지) 에 대한 내용을 사초에 기록하려했던 것이다.

 

문제의 사초 내용
문제의 사초 내용



당시 연산군의 눈에 들기 위해  유자광은 사초 문제를 나서서 키웠고 연산군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이 내용을 기록한 김일손을 잡아들이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연산군을 더욱 분노하게 만든 불씨를  또 다시 유자광이 가져온다.

 

유자광
유자광 1439~1512


김종식의 조의제문의 속 의미 
김종식의 조의제문을 단종이 세조에게 죽임을 당해 버려졌는데 단종이 너무 불쌍하다는 내용으로 다시 한번 연산군의 증조할아버지 세조를 욕하는 것으로 유자광이 해석을 하여 가져왔던 것이다.  결국 연산군은 삼사를 붕단조성죄로 처벌을 했다. 

 

조의제문의 속 내용 분석 1
조의제문의 속 의미
조의제문의 속 의미
조의제문의 속 의미
조의제문의 속 의미
조의제문의 속 의미


김일손의 능지처사 

김일손은 극형인 능지처사를 당하고 조의제문을 작성한 김종식은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연산군은 그를 부관참시(무덤을 파서 시체의 목을 베는 형벌)했다.  이렇게 50여명이 사형, 유배, 파직당하고 끝이 난다.

 

능지처사 정의
능지처사


무오사화 이후 사치와 향략에도 빠져 나라가 걷은 세금보다 연산군 혼자 사용하던 돈이 더 많아진다. 이에 연산군 8년 삼정승은 시폐 10조 연산군이 저지른 폐단과 실정을 10가지의 향목을 기술하여 연산군을 저지했고 이에 신하들에게 경고를 했다. 


갑자사화 
갑자사화는 무오사화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끔직하게 많은 죽음이 일어난다. 이때는 또 다른 희대의 간신 임사홍/ 임숭재 부자가 등장한다. 

 

임사홍 임숭재
임사홍 임숭재



임사홍 임숭재 부자는 조선시대 희대의 간신으로 갑자사화를 주도한 장본인들이다. 1504년 3월 19일 평소와 같이. 임숭재의 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때 임사홍은 폐비 윤씨의 일을 연산군에게 알리게 되고 성종의 후궁 엄씨와 정씨가 폐비 윤씨를 중상모략하여 그 계략으로 죽임을 당했다고 한 것이다. 

 

중종의 후궁을 젓갈을 담궈 뿌림.

이에 연산군은 정씨와 엄씨를 자루에 넣어 마구 치게 하고 엄씨와 정씨의 아들을 불러 매질을 시켰다. 어머니인지 모르는 향과 눈치를 챈 봉은 머뭇거렸고 이에 연산군은 향과 봉을 끌고 연산군의 할머니 인수대비의 처소로 난입하여 할머니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이셨습니까?라고 광기를 표출해 야사에는 인수대비가 이 일로 죽음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엄씨와 정씨를 분이 풀리지 않아 소금에 절여 산과 들에 뿌렸다.  


쇄골표풍

갑자사화로 그 피해자만 무려 200여명에 이르고  연산군의 광기는 막을 수가 없게 된다 . 조선 역사상 유례없는 잔악한 형벌을 가했던 연산군이다. 

 

쇄골표풍
잔악한 형벌 쇄골표풍

 

연산군은 부관참시도 만족하지 못하고 김일손을 '쇄골표풍 ' 이라고 하여 죽은 자의 묘비를 부수고 유골을 파헤쳐서 해골을 부수어 가루로 만든 다음 해골가루를 바람에 날려 보낸다는 뜻이다.  당시 조선은 조상을 섬기는 유교문화가 엄격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당시의 가치관으로는 상상도 할수 없는 형벌이었다.     

 

쇄골표풍이란
쇄골표풍이란



연산군의 최후 (중종반정)
연산군을 몰아내려고 신하들은 연산 12년 9월 1일 저녁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추대하는 중종반정을 일으킨다. 미치광이 왕 연산을 몰아내고 조선 최초의 반정인 중종반정이었다. 이렇게 반정이 성공하는데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다.  옥새를 확보한 반정 세력은 연산군을 강화군 교동도로 유배를 가게 되고 유배생활 2개월 만에 역질(전염병)로 사망한다. 이때 연산군의 나이는 31세였다. 

강화도 교동도에 위치한 연산군 유배지
초라한 방 한칸에 있는 연산군은 죄인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는 벌인 위리안치가 되었다.

 

강화도 연산군 유배지 1
강화도 연산군 유배지 1
강화도 연산군 유배지 2
강화도 연산군 유배지 2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는 연산군묘가 위치한다. 왕의 묘는 릉이라 불렸지만 연산군은 대군이기에 묘로 불렸다. 그래서 무덤 주변에는 왕의 예우를 갖춘 구조물이 아무것도 없다. 

연산군묘 서울 시내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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