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정변 1170년
고려 시대를 두 시기로 나누는 분기점은 무신정변이 있던 1170년이다.
무신들은 대체 왜 정변을 일으켰을까?
당시 고려에서 무신의 위치는 그렇게 좋지 않았다. 고려시대 처음 생긴 개념 양반은 문반과 무반을 합친 말로 고려 초에는 문, 무반을 구분하지는 않았다. 나라가 커지면서 나라의 정치를 맡게 된 문신과 군대를 이끌 무신의 분업의 필요성을 느낀 고려는 이를 구분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신과 무신이 올라갈 수 있는 벼슬에 차이를 두었다. 최상위 등급인 1품과 2품에 오를 수 있는 것은 대부분 문신이었다.
재추회의 (고려 최고권력기구)
문신만 가능했던 벼슬 중에 재추가 있다. 고려시대 왕을 제외한 제일 높은 직책으로 왕과 함께 국가 중요 사안을 논의하고 돕는 역할을 했던 직책이었고 재추회의를 통해 재추들이 국가 중대사인을 논의하는 의사 결정기구가 있었다. 초반 무신은 이것에 대한 불만이 없었다. 그저 차별이 아니라 차이로 받아들였으나 중요 정책들을 문신이 결정하는 것이 늘어나고 시간이 지나면서 무보다는 문을 중시하게 된 것이다. 문신만 참여할 수 있던 재추회의였고 점점 문신을 우대하는 분위기는 고려 사회에 펴져나가고 있었다.
무신정변 원인
김돈중 무신 정중부 수염을 태운 사건
이런 상황에서 무신정변의 핵심인물 정중부는 왕을 호위하는 부대 견룡부의 장교였다. 1144년 38세 정중부의 인생을 바꾼 사건이 발생한다. 왕이 베푼 연회장에서 한 무신이 촛불을 들고와서 정중부의 수염을 태운 것이다. 문신의 이름은 김돈중으로 과거에 갓 급제한 새내기 문신이었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던 왕은 수염을 태운 김돈중이 아닌 수염이 탄 정중부에게 벌을 주려했다. 김돈중의 아버지가 무소불위의 권력자였기 때문이다.
김돈중의 아버지는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이었던 것이다. 김부식은 종 1품의 문하시중이었고 문신중 최고 권력자에 해당되었다. 이에 김부식의 아들이란 이유로 과거시험에서 2등으로 합격했으나 1등으로 올리고 내시로 임명했다.
고려시대 환관과 내시는 다르다.
환관은 어린 시절 남성 구실을 못하게 된 사람으로 대다수가 천민 노예 출신이었으며 궁 내 잡일을 담당했다. 반면 내시는 과거나 음서를 통해 선발된 문신으로 왕명 전달, 호위 등 문신의 엘리트 코스를 밟았던 사람들이다.
정중부는 화가나서 김돈중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김부식은 곧바로 왕에게 달려가 정중부의 처벌을 요청한다. 정중부는 이로 인해 문신에게 앙심을 품게 된다.
무신의 불만을 고취시킨 의종
수염 사건 당시 고려의 왕은 인종이었다. 인종이 타계한 뒤 고려의 왕은 의종으로 무신들의 분노를 폭발시킨 의종이 일으킨 사건이 있다. 의종은 왕이 된 이후 문신들과 사치와 향략을 즐기며 국정에는 관심도 없었다. 또한 이런 사치와 향락을 위한 연회 준비 및 호위는 무신이 하고 있었고 이들에게 식사도 제공하지 않았었다. 점점 무신들은 불만이 쌓여갔고 결국 쿠데타를 결심하기에 이른다. 정중부의 수염을 태운 사건 이후 26년이 흐른 어느 날 정중부, 이의방, 이고는 1170년 왕의 연회날에 처음 만났다. 연회장에서 분함을 토로한 이의방과 이고와 함께 기회가 찾아온다.
화살사건
1167년 정월 연등회가 있던 저녁 의종이 봉은사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그런데 의종이 타고 있던 가마옆에 화살이 갑자기 어딘가에서 날아와 떨어진다. 이에 의종은 계엄을 내리고 호위를 강화한다. 의종은 태자 시절부터 동생 대령후를 경계하고 있었는데 화살 사건의 배후로 대령후의 시종을 의심하고 있었고 그를 가혹하게 고문하여 죽인다. 또한 자신을 호위하던 무신 14명을 유배를 보내버렸다. 그러나 실제 배후는 김돈중이라는 문신이 벌인 일이었다. 김돈중의 길들여지지 않은 말이 움직이다가 옆에 무신의 화살통을 차버리게 되고 그 화살이 공교롭게 의종의 가마로 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김돈중은 사건이 점점 커지는 것을 보고 자수하지 않는다.
1170년 4월 하급 무신이었던 이고, 이의방이 상장군 정중부에게 쿠테타를 제안을 한다.
보현원 사건
1170년 8월 30일 오전 왕이 보현원이라는 사찰에서 연회를 즐기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는 소식이었다. 정중부의 견룡군은 정변 계획을 숨긴 채 왕과 문신들을 호위했다. 그러나 이때 왕은 예정에 없던 오병수박희(5명이 한 조를 구성해 맨손으로 격투를 하는 시합) 라는 무술 행사를 열기로 한다. 맨손으로 무술을 겨루는 무예로 수박도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 무술 시합에서 대장군 이소응와 젊은 병사가 무술 대결을 하게 되고 지친 무신 이소응이 경기장 밖으로 도망치려 하자 왕의 측근 문신이던 한뢰가 그대로 걸어가서 노장 이소응의 빰을 내리친 것이다. 빰을 맞은 이소응은 계단 아래로 구르기까지 했다. 지위와 나이도 어린 종 5품 문신이 종 3품 대장군의 빰을 친 것이다. 그러나 더 놀라운 건 왕과 신하의 반응이었다. 뺨을 맞은 이소응을 보며 박장대소하며 웃고 있었던 것이다.
정중부의 난 (= 무신정변 당일)
보현원에 도착한 왕과 일행들은 기다리고 있던 무신들에게 죽임을 당한다. 무신정변의 시작이었다. 무신정변의 원인 한뢰를 죽인 후 본격적인 대살육이 시작되었다. 문신을 모조리 죽였다. 이때 김돈중은 도망갔다. 그는 무신란을 피해 파주 감악산으로 숨어 들어갔으나 그의 시종이 정중부에게 김돈중의 거처를 발고했다.
미리 보내진 무신들에 의해 개경 궁궐에 남은 문신들도 무참히 살해되었고 정중부는 왕과 함께 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정중부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는 금방 발각되어 계획에 가담했던 문신과 환관 10여 명을 죽인다. 그리고 정변 4일째 의종을 거제도로 추방했다. 의종 이후 정중부와 이의방은 인종의 셋째 아들을 새 왕으로 추대한다. 그가 바로 고려 19대 왕 명종이다.
이후 의종은 경주 곤원사 북쪽 연못가에서 이의민에게 척추가 꺽여서 죽임을 당했다. 그 이후 가마솥 두 개에 시신을 넣고 연못에 던저 버렸다.
정변 이후 무신은 문반직을 얻어 국정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폐위된 의종을 복위하려는 세력들이 존재했다. 그래서 정변 세력은 의종을 잔혹하게 살해한다. 이후 100년 동안 무신들이 집권하는 무신 집권기가 도래한다. 무신정변의 주역이고, 정중부, 이의방은 서로가 권력을 차지하겠다고 죽고 죽이는 권력 싸움 끝에 모두 죽는다. 명종이 오른 27년간 4번이나 무신들의 정권은 교체가 된다.
[그날 443]
▼이의방-정중부-경대승- 이의민- 최충헌까지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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