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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벌거벗은 한국사

크리스마스 트리는 어떻게 확산이 되었나? 131 -1 유럽에서 시작된 크리스마스 문화가 전 세계로 퍼져나간 계기는 영국에 의해서이다. 19세기 빅토리아 여왕시기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며 전 세계 인구의 1/4 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국의 영향을 받아 인도, 아프리카등 여러 나라에 크리스마스 문화가 전파되었다. 특히 빅토리아 여왕시절 크리스마스를 대표하는 크리스마스 트리는 장식했는데 빅토리아 여왕의 부근 앨버트 경은 독일 출신이었다. 이 앨버트 공이 독일의 트리 문화를 영국 왕실에 가져온 것이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독일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1517년 마틴루터가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마틴 루터가 밤에 전나무를 보는데 전나무에 별이 걸려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고 이에 전나무를 집에 가져와 장식물을 걸어줬다고 한다. 이후 1840년경 .. 더보기
유교란 무엇인가? 삼강행실도 내용 87 -1 오늘날까지도 명절이면 제사를 지내는 풍습은 유교로 부터 시작된다. 조선의 이데올로기가 유교이고 현재까지 많은 유교 관습이 남아있다.  유교란 무엇인가?  유교는 종교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2500년전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사상가 공자가 체계화하고 설파한 사상을 유교라 불렀다. 원래 공자의 사상은 학문으로 유학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공자를 성인으로 숭상하고 제사를 지내면서 종교적 의미를 내포한 유교라는 단어를 쓰기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유교는 학문인 유학에서 시작된 것이다.    공자가 유학을 만든 이유는 공자가 살던 춘추전국시대는 계속된 전쟁으로 극도의 혼란 상태였다.  백성들은 고통받고 도덕과 정치 모두 무너진 상황이었다. 이때 공자가 인간답게 살려면 각자의 본분과 질서를 지켜야 .. 더보기
신사임당 이야기 (본명, 오죽헌, 남편 이원수를 택한 이유, 대표작 등) 75 신사임당의 이미지는 현모양처로 가장 많이 떠오른다. 그녀는 조선의 대학자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자 휼륭한 아내로 알려진 대표적인 조선의 여성상이다. 그러나 신사임당이 살던 조선 초기 , 그녀는 현모양처로 유명했던 것이 아니였다. 사실 그녀는 유명한 화가였다. 율곡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산수화와 포도를 잘 그렸던 화가로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것만 무료 40여점에 이르고 5만원권 지폐 속에서도 그녀의 작품들이 2개나 들어가 있다. 사실 오천원 지폐에는 이미 신사임당의 그림이 들어 있다. 그래서 오만원권 뒷면에는 동시대에 활동했던 화가 어몽룡과 이정의 그림을 넣었다. 오죽헌 그런데 왜 우리는 많은 그림을 남긴 신사임당을 화가가 아닌 현모양처로만 기억하는 것일까? 신사임당은 1504년 조선의 대표 명문.. 더보기
김삿갓은 누구? 유명한 시 , 삿갓을 쓴 이유 , 무덤은 어디? 73 조선의 27대 왕 순조가 다스리던 시기에 방방곡곡을 떠돌며 살았던 김삿갓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김삿갓의 신분은 기반 세력과 살림이 아주 보잘것 없는 양반인 잔반이었다. 잔반은 중앙정치에서 밀려난 몰락한 양반을 뜻한다. 김삿갓은 누구? 김삿갓은 집안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린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당시 높은 위세를 자랑했던 장동 김씨 집안이었다. 안동 김씨의 분파로 장동 김씨 가문이었고 경복궁 북쪽 근처에 위치한 지금의 효자동 창성동 통의동을 일컫는 지역이다.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이었다. 아버지는 김안근으로 4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장동 김씨들은 안동 김씨에서 분파되었지만 순조의 외척이였기 때문 자신들은 특별한 존재라 생각했다. 그들은 왕실의 외척으로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세도정치를 펼쳤던 세력이었다.. 더보기
하륜 이방원의 킹메이커 : 왜 정도전을 죽였을까? 72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 시대의 이인자이자 조선개국 일등 공신이다. 태조 이성계의 오른팔이 정도전이였다면 태종 이방원의 오른팔은 하륜이었다. 하륜은 태종 핵심 참모이자 굳건한 이인자였다. 하륜은 누구? 하륜과 정도전은 그들이 모시던 일인자 이방원 이성계와 똑같은 운명을 걷게 된다. 1365년 고려 공민왕 시기에 개경에서 과거시험이 열리던 날이었다. 하륜의 고향은 진주였다 진주에서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었던 하륜의 집안은 사실 출세하는 거리가 먼 집안이었다. 이런 집안에서 자란 하륜은 나이가 들면서 집안 어른들과 다르게 성공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다. 이에 과거 시험에 합격하겠다는 굳은 의지로 서울에 올라온 하륜은 드디어 문과에 19세에 급제하게 된다. 과거 급제 후 하륜의 좌주는 이인복이라는 .. 더보기
장녹수 연산군의 총애를 어떻게 얻었나? 그녀의 최후는? 70 조선 왕조 10대 왕이자 폭군의 대명사 연산군의 후궁이었던 장녹수는 궁궐에 들어오기 전 기생이었다. 기생 장녹수는 어떻게 폭군 연산군의 마음을 얻었을까? 1502년 연산군 8년은 연산군의 폭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이다. 연산군은 조선팔도 춤, 노래, 미녀를 색출해 궁궐로 불러들여 음주, 가무를 즐기려 했던 것이다. 이런 가무기생들에게 '운평'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운평 중에서도 뛰어난 이들을 선별해 '흥청'이라고 불렀다. 장녹수는 운평으로 뽑히는 과정 없이 바로 흥청이 된다. 당시 연산군은 예술에 있어서 누구보다 예민한 눈과 귀를 가진 왕이었기 때문에 타고난 감수성이 풍부했던 연산군은 자신의 시집을 내기도 하고 가면을 쓰고 추는 처용무에도 능했다. 그래서 자기처럼 예술적 기질이 뛰어난 장녹수에게.. 더보기
수렴청정 언제부터, 누구 시작했나? (43-3) 이전글 : 대윤 vs 소윤 43-2 1545년 7월6일 12살 경원대군은 조선 제 13대왕 명종이 된다. 그리고 왕이 된 명종과 함께 문정왕후는 어린 명종을 대신해서 수렴청정을 하기 시작한다. 이 수렴청정의 유래는 발을 내리는 행위로 문정왕후가 처음으로 시작한 것이다. 문정왕후 이전에 처음으로 수렴청정했던 성종의 할머니 정희왕후는 직접 편전에 나오지 않고 자신의 거처에서 정무를 봤었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이전과 차원이 다른 수렴청정을 펼친다. 조선최초로 왕이 업무를 보는 편전에 나와서 국정운영을 한 것이다. 심지어 경연에도 참석했다. 그렇게 대신들과 함께 자리에서 문정왕후는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내세우며 국정운영을 주도했다. 문정왕후는 자신이 왕인것 처럼 정치 전면에 나섰다. 중종 때 수많은 사건을 겪.. 더보기
을사사화 - 정미사화 (양재역 벽서사건 ) 43-4 이전글 : 수렴청정 언제부터, 누구 시작했나? (43-3) 을사사화 문정왕후는 대윤파를 제거하기 위한 계획에 돌입한다. 대윤파의 수장이었던 윤임을 제거한 것이다. 문정왕후는 윤원형에게 윤임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라고 했고 이때 정순붕이라는 인물이 대윤파의 수장인 윤임이 역모를 꾸몄다는 상소가 올라오게 된다. 정순붕은 윤원형과 뜻을 함께 했던 소윤파의 핵심 인물로 이 상소 덕분에 문정왕후는 윤임을 유배보내고 사약까지 내리며 윤임을 제거할수 있었던 것이다. 윤임과 함께 엮였던 대윤파 역시 대부분 사사된다. 양재역 벽서사건 = 정미사화 을사사화 2년 후인 1547년 말죽거리 양재역에 괴문서가 붙게 되었다. 그 내용은 여주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더보기
대윤 vs 소윤 43-2 이전글 -> 문정왕후는 어떻게 중종의 3번째 왕비가 되었나? 김안로 추출 문정왕후에게 자식이 없다가 3명의 공주 출산 후 마침내 경원대군이 탄생한다. 그러나 인종의 세력은 경원대군을 경계하기 시작하고 이 세력의 가장 우두머리가 김안로였다. 이에 그들은 문정왕후의 남동생들인 윤원형과 윤원로가 유언비어를 퍼뜨린 하고 중종에게 고하고 중종은 윤 씨 형제를 파직하고 유배를 보냈다. 실상은 가짜뉴스로 윤 씨 형제를 내쫓으려 했던 김안로의 계략이었다. 그러나 윤원로가 중종을 몰래 찾아가 김안로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이에 화가 난 중종은 다음날 김안로를 유배를 보내고 사약을 내렸다. 사실 중종은 김안로가 세력을 키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런 김안로가 문정왕후의 측근들과 갈등을 일으키자 선을 넘었다고 생각해 이 같.. 더보기
황희 정승 이야기 42회 황희는 조선 역사상 최장기 제상에 있었고 87세에 은퇴를 했다. 1363년 고려말 황희는 개경에서 태어났는데 어릴때 부터 영특해서 읽은 건 잊지 않는 총명함으로 남들과 달랐다. 황희가 처음 관직에 오를때는 고려 32대 왕 우왕(재위 1374~1388) 시기였다. 14세~ 30세 황희는 고려 , 조선시대에 공신 혹은 고관의 자제를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를 채용하던 음서제도에 의해 관직에 14세에 나갔다. 그리고 27세에 과거에 급제한 후 성균관 학관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3년 후 실직하게 된다.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개국 후 이성계(태조)가 다시 황희를 찾았고 황희의 능력과 인품을 높이 사 직접 조선 관리로 임명한다. 그렇게 황희는 고려 우왕 창왕 공양왕에 이..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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