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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Here

부산 감천문화마을 / 아미동 비석마을 역사

아미동 비석마을 

아미동 비석마을도 굉장히 유명한 당시의 대표적인 피란촌인데 부산 아미동을 비석마을이라고 부른이유는 일제강점기에 아미동에는 일본인 공동묘지와 화장장이 있었다. 개항되기 전에는 용두산 공원을 중심으로 초량왜관이라는 일본인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고 그 당시에 일본인들 공동묘지는 지금 용두산 북쪽 자락인 복병산에서 대청로로 흘러나오는 주변에 있었다. 그러다 1904년 북항을 매축하면서 필요한 토석을 확보해야 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때 복병산 자락의 토석을 채취하면서 평지화해야 되는 일이 벌어지니 일본인 공동묘지가 아미동일대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공동묘지였던 아미동

 

일제가 패망하자 황급히 떠난 일본인들이 무덤을 그대로 남겨두고 간것이다. 피란민들은 유골함을 제거한 후 묘지마다 세워진 비석을 재료로 무덤 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 

 

비석문화마을

 

아미동으로 가는길에 까치고개는 옛날 죽은사람을 위한 위령제가 열렸던 곳이다. 제사음식을 노리는 까치들이 많이 와서 붙여진 이름이다. 

 

까치고개

 

 

감천문화마을

아미동 산복도로를 따라 올라가다보면 감천동의 독특한 집들이 모여있다. 감천마을을 부산의 산토리니, 한국의 마추피추라고 부르지만 사실 이곳은 피란촌이었다.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이 천마산 비탈을 따라서 판잣집을 지어서 형성된 판자촌이었다. 제일 유명한 동네가 부산의 영주동이었고 우암동 소막마을, 초량동 판자촌, 아미동 비석마을이 굉장히 유명한 당시의 대표적인 피란촌이었다. 

 

감천문화마을

감천동이 지금의 모습을 형성한데에는 태극도라는 종교의 영향을 받았다. 태극의 음양사상에 기초해서 만든 증산도의 영향을 받아 조철제가 만든 민족종교이다. 충청도에 세력을 형성하던 태극도 사람들은 광복이후 부산 보수동으로 와서 활동을 한다. 이후 부산시가 판자촌 철거를 지시하면서 신앙촌을 감천동으로 옮기게 되었고 4000여명의 사람들이 집단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에 당장 집을 집고 살아야 되는 상황이라 집과 집사이 다닥다닥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집이 한집처럼 보여도 한집당 배정받은 땅은 7평 정도였다. 

 

태극도 본당

 

감천문화마을은 실제 피란민들이 살았던 집들이다. 현재는 비어있는 곳이 많다. 옛날에 부산에는 화재가 많이 발생했고 주거 환경도 문제가 많았다. 산동네이다 보니 수도사정이 좋지 못해 식수를 비탈진 산길을 걸어 물을 퍼와야 했고 화장실이 없어서 비만 오면 오물이 넘쳐 흘렀다. 그러나 그런 판자집이라도 살수만 있으면 다행이던 시절이다. 

 

 

2000년 들어서면서 예술인들이 마을의 빈집을 사용하며 벽화를 그리고 창작활동을 하면서 마을 아트샵에서 판매도 하고 있다. 거대한 미술관 같은 마을이다. 감천문화마을을 변화시킨 프로젝트는 "부산 마추픽추 꿈꾸기" 프로젝트였고, 이 프로젝트는 2009년에 시작되었다.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오랜 세월 동안 낙후되고 방치된 마을을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재탄생시키는 것이다.

 

 

감천문화마을 박물관은 빈집을 활용해서 주민이 기부한 50년대 생활상 물건을 전시하고 있다. 피란민들이 사용하던 집, 물품등 전시되어 있다. 감천문화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이 하늘마루 전망대이다. 이곳에 올라가면 인상적인 계단식 집들을 감상할 수 있다. 

 

 

60년대 중반까지는 철거민에 대한 대책이 없었다. 빈번한 화재와 주거 환경 개선 문제로 판자촌을 철거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철거민들은 오갈때 없는 사람들이라 다시 그 지역주변에 집을 짓고 살았다. 어제 철거하면 오늘 새로 집을 짓고 오늘 철거하면 내일 새로 짓고 철거 재축이 반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