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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도끼만행사건 요약 정리

1976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벌어진 도끼 만행 사건은 8월 18일 오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노무자들의 작업을 경비하던 유엔군 경비병들을 북한 군인 약 30여명이 계획적으로 기습해 와서 도끼와 곡괭이를 마구 휘둘러 미군 장교 두 명을 살해하고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 측 경비병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유엔 관측 차량 3 대가 부서졌다. 

 

 

이 사건으로 유엔군 소속 미군 장교 2명이 사망했다.  유엔군 3초소 앞에는 큰 미류나무가 있어서 유엔군 5초소가 커퍼를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자 시야 확보가 필요했고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결정한다. 

 

 

당시에 공동경비구역 내 군사분계선 표시가 없었기 때문에 남북 왕래가 자유로웠던 JSA지역이었고 사소한 다툼이 많은 지역이기도 했다. 이날 북한군이 가지치기를 하지말라며 시비를 걸어왔고 결국 무기까지 들고와서 공격을했다.  북한이 도끼를 휘둘러 가지치기 인부들을 담당하던 보니파스 대위가 그 자리에서 죽었고 그의 부하 배럿 중위도 죽었다. 

 

 

그렇다고 어떻게 미군 대위를 죽일수 있었을까? 당시 미군은 1975년 베트남전에서 패배해서 사기가 꺽일대로 꺽여있었고 북한 입장에서는 베트남 호찌민의 공산주의 통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을 만만하게 본 것이다. 

 

미국인 장교 2명이 살해되자 분노에 찬 미국은 폴 버니언 작전을 실행한다.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에 대한 반격으로 미국과 한국이 미루나무를 벌목하며 펼친 대규모 무력 시위로 한반도에 데프콘 3 까지 발령하면서 전쟁태세에 돌입하자 결국 김일성은 유감성명을 전달한다. 사실상의 사과였다.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직후 박정희 대통령 또한 분노로 64인의 특전사를 투입하는 보복 작전을 펼쳤다. 원래 공동경비구역 내에는 무기 소지가 제한되어 있었고 인가받은 무기이외의 것은 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특전사 경호 아래 미루나를 절단했던 미군이었다. 

 

 

미루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순직한 병사들을 위로하는 비석만 남아있다. 그러나 사건의 주범이였던 북한 군인은 북한에서 영웅 칭호를 받았다. 또한 당시 사용한 도끼를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자세한 내용 보기 (폴버니언작전/데프콘상태란/도끼만행사건이후변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Ax Murder Incident) & 폴 버니언 작전

JSA(Joint Security Area:공동경비구역)는 크게 3번의 전환점이 있다. 1953년 정전협정-군사분계선을 넘어 대화가 가능했던 시절, 70년 이전에는 국군, 미군,북한군 할것 없이 비무장에 가까운 상태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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