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orean History

경회루 이야기

반응형

경회루는 태종 이방원이 서울로 돌아올때 경복궁으로 가지 않고 창덕궁을 새로 지었는데 자신이 경복궁을 버린 것이 아닌 궁궐은 양궐 체제로 있어야 된다고 말하며 법궁으로서의 경복궁을 부각하려 경회루를 새로 짓게 한 것이다. 

 

경회루

 

 

경회루는 천민출신 박자청에 의해 만들어진 건물이다. 성균관 문묘, 청계천의 광통교, 창덕궁의 금천교, 등을 만든 사람이다. 당시 경회루 공사에만 5천 명이 동원되었는데 1411년 8월 착공 1412년 4월 8개월 만에 완공이 되었다.  연회와 강연의 장으로 사용되었던 경회루는 옛날에는 담이 있어 왕과 일부 신하만 갈 수 있던 장소였고 안을 볼수가 없었다. 한 일화로 직급 낮은 관리가 담을 넘어 구경하다가 세종을 만났는데 세종은 노래 한 곡 해보라고 했다. 그만큼 은밀하고 풍류가 있는 곳이었다.

 

 



건축 당시 청동 용 두마리를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 연못에 넣었지만 하나만 발견되어 현재 고궁박물관에서 전시중이다. 

 

경회루 연못에서 발견된 용

 

경회루를 지으며 하륜 대감이 경회루에 받친 글을 지었다. 

 

하륜의 경회루 기문 중

 

 

누각을 짓는 것은 나라를 경영하는 것과 비슷하니 

기둥을 바르게 세우는 것은 국가의 기업을 튼튼히 하는 것이다. 

대들보가 두꺼운 이유는 무거운 것은 약해서는 안 되는 까닭이요. 

서까래와 문설주의 작은 부재들은 각자의 소임을 다하는 것과 같다. 

높이 올라 밖을 내다보는 것은 국가 운영의 안목을 넓게 하자는 뜻이요. 

위에서 아래를 볼때 두려움은 백성을 경외하는 마음과 같다. 

.......

 

 

경회루는 약 1000m2 넓이에 48개의 돌기둥 위에 2층 누각을 세웠다. 천여명이 한 번에 모일수 있는 연회 공간이다. 기록에 따르면 1200명까지 연회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경회루는 단위면적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누각이다.

 

경회루는 연못이기 때문에 물이 가만히 있으면 고여서 썩기 때문에 물이 들어오는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경사진 바닥을 가지고 있다. 강제 순환없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설계된 연못이다. 

 

경복궁 내부 경회루 면적은 약 1000m2 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