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orean History

김신조 사건 : 1968년 1.21 사태 - 김신조는 왜 목사가 되었을까?

반응형

김신조 사건은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무장 공작원들이 한국 청와대를 습격하려던 사건으로, 한국 현대사에서 북한의 도발 사례 중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은 당시 박정희 정권 시기 남북 간의 극심한 긴장 상황 속에서 벌어진 일이며, 이후 남한 사회와 정부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건의 발생 배경, 진행 과정, 그리고 결과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1. 사건의 배경

 

1960년대 말은 남북 간의 대립이 매우 첨예했던 시기이다. 한국전쟁 이후 남북은 군사적으로 대치한 상태였고, 북한은 당시 김일성 주석의 지휘 아래 "남조선 혁명론"을 추진하며 남한 체제를 전복하고자 했다. 특히 1968년은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미국은 베트남전에 집중하며 동북아시아에서의 군사적 영향력이 일부 약화된 상황이었다. 이를 기회로 삼아 북한은 남한 내부의 혼란을 조성하고 정권을 흔들어 국가 전복을 노렸다. 김일성은 1967년 말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고 남한 사회를 대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특수부대원들을 조직, 청와대 습격 작전을 계획했다.

 

2. 사건의 전개

(1) 침투 준비

북한은 민족보위성 산하 정찰국 소속 124부대의 정예 요원 31명을 선발하였다. 이들은 청와대 습격이라는 특수 임무를 위해 혹독한 훈련을 거쳤다. 124부대는 당시 북한군 내에서도 최정예 부대였으며, 게릴라전, 산악전, 도시 침투 작전에 능숙한 요원들로 구성되었다.

 

자신의 북한 국민을 다 사살후 북 당국은 남한의 특공대가 와서 한 만행이라고 발표했다.

 

(2) 남한으로의 침투

1968년 1월 17일 밤, 무장공비들은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한으로 침투하였다. 이들은 하얀 천으로 만든 덮개를 뒤집어쓰고 남한의 눈 덮인 산악지대를 은밀히 이동하며 적발을 피했다. 이들은 3일 동안 파주와 고양, 북한산 일대를 거쳐 서울 인근까지 도달했다. 침투 과정 중, 파주 삼봉산에서 나무꾼 우씨 4형제와 마주쳤다. 공비들은 그들을 죽이지 않고 "우리는 북한군이 아니다"라고 속이며 풀어주었다. 하지만 우씨 형제는 즉시 경찰에 신고하였고, 이에 따라 남한 군경은 수색작전을 시작했다.

(3) 서울 진입과 청와대 접근

1월 21일 저녁, 공비들은 군복을 벗고 남한 군인처럼 보이기 위해 남한 군복으로 위장한 후 청와대 인근까지 접근했다. 이들은 청와대를 불과 500m 앞둔 세검정 고개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렸다. 경찰은 "소속 부대와 군번을 말하라"고 요구했으나 이들이 대답하지 못하자, 정체가 드러나며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종로경찰서 최규식 서장이 순직했으며, 일반 시민과 군인 다수가 피해를 입었다.

(4) 소탕 작전

공비들은 산으로 도주를 시도했으나, 남한 군경이 전면적인 추격 작전에 돌입했다. 31명의 공비 중 29명은 사살되었고, 1명은 북으로 도주했으며, 생존자 김신조는 포로로 생포되었다. 김신조는 생포된 후 서울 대방동  주한미군 502 군사정보단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주한미군 소속의 마이클 리가 4개월동안 김신조를 심문했다. 그는 생포 후 "우리는 박정희를 죽이러 왔다"는 말을 하며 사건의 진상을 밝혔다. 

 

김신조가 끌려갔던 곳

 

3. 사건의 결과와 여파

 

김신조 사건은 남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후 군사 및 보안 정책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1) 향토예비군 창설

이 사건으로 국가 방위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박정희 정부는 1968년 4월 1일 향토예비군을 창설하였다. 이는 지역 방위와 민간인의 군사적 역할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2) 주민등록증 제도 도입

공비들의 신분 위장이 사건을 악화시킨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되면서, 모든 국민의 신원을 철저히 확인하기 위해 주민등록증 제도가 도입되었다. 이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개인 신분 확인의 필수적인 제도로 자리 잡았다.

(3) 청와대 경호 강화

사건 이후 청와대 경호가 대폭 강화되었으며, 청와대 주변의 일반인 통행이 금지되었다. 특히 북악산과 인왕산 등 청와대 주변 지역은 일반인의 접근이 불가능해졌다.

(4) 군 복무 기간 연장 및 교련 교육 강화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군 복무 기간이 연장되었으며,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교련 교육이 의무화되었다. 이는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통해 비상시를 대비하도록 한 정책이다.

 

김신조는 왜 목사가 되었나? 

생포된 김신조는 중앙정보부의 조사 후 사형을 받을 예정이었으나 조사원들의 탄원서를 제출, 역사의 산증인으로 살려두기로 한다. 이때 김신조를 심문했던 조사관 마이클 리는 자신의 종교였던 기독교에 대해 많이 얘기했고 이것에 관심을 보였던 김신조는 출소 이후 그는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한국 사회에 자신을 참회하는 삶을 보여주었다. 그는 현재 "김재현"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북한 체제의 실상을 알리는 데 기여하고 있다.

 

 

 

북한의 반응

북한은 이 사건에 대해 시신 회수를 거부하고 사건 일체를 부인하였다. 남한의 자생적 혁명 세력이 일으킨 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 현재 29명의 시신은 북한으로 회수되지 않아 파주 적성면 답곡리에 묻혀 있다.

 

최근 관련 소식

2022년 1월 21일, 사건 발생 54주년을 맞아 김신조와의 인터뷰가 보도되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남북 간의 대립이 가져온 비극을 이야기하고, 탈북자와 분단 현실에 대한 관심을 호소했다. 또한, 향후 통일에 대한 염원을 밝히며 자신이 북한 체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김신조 루트 그림 설명 

 

김신조 사건 (김신조 루트, 근황)

김신조 사건이란? 김신조 사건은 1968년 1월 21에 일어난 사건으로 31명의 북한의 124 부대 무장 특수 부대원이 우리나라로 침투한다. 이들은 북한산 일대를 지나 서울 시내로 진입에 성공한다. 청

jangane.tistory.com

 

 

 

1.21 사태 (청와대 기습미수사건) 한국사회 미친 영향이 이렇게 많았다

1.21 사태 1968년 1월 21일 밤 청와대 인근에서 북한 특수부대원들과 총격전인 벌어진다. 31명 중 생포된 인물은 단 한 명으로 그가 바로 김신조이다. 31명의 임무는 박정희 대통령 암살하는 것이었

jangane.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