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를 걷다 보면, 마치 신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주는 장소가 있다. 바로 월정교이다. 처음 이 다리가 세워졌을 때는 단순히 강을 건너기 위한 교량이 아니었다. 궁성과 마을을 잇는 다리이자 신라인들의 문화와 예술이 깃든 장소로, 당시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그 아래 강바닥에 숨겨진 기술적 비밀과 월정교를 둘러싼 전설들은 오늘날에도 경주를 찾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월정교의 뜻과 기원
월정교(月精橋)의 이름은 "달의 정수가 흐르는 다리"라는 뜻으로, 신라의 예술적 상상력을 담고 있다. 이 다리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년) 시기에 처음 세워졌다고 한다. 다리는 궁성과 외곽을 연결하며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했으며, 동시에 신라 귀족들의 정원과 유흥 공간으로도 활용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월정교는 자연재해와 전란으로 인해 오랜 세월 동안 그 흔적을 잃었다.
월정교는 총 길이 63m, 넓이 12m, 높이 5m로 원형 그대로를 복원한 것이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월정교는 2007년에 복원된 모습으로, 발굴 조사와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재현되었다.
월정교 입구 앞에 사자상 석축이 서 있는데 이로 짐작하기로 번화가였고 사신이 지나갈때 이 다리를 사용했다고 한다. 복원을 위해 기존에 출토된 석재들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색이 다른 부분이 많이 보인다. 석축도 색깔이 다르다.
월정교의 건축적 특징과 기술
월정교는 단순한 교량이 아니라, 신라의 뛰어난 다리 축조 기술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다리의 기초석은 물의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마름모 모양으로 만들어졌고, 강바닥에는 토양 유실을 방지하기 위해 격자 형태의 나무를 박은 뒤 그 안에 돌을 채워 넣는 세심한 설계가 적용되었다. 이러한 기술적 배려는 신라 사람들이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하며 실용성과 미학을 동시에 추구했음을 보여준다.
발굴 당시, 월정교 아래에서는 세굴 방지를 위해 사용된 나무 기둥(세굴방지목)이 다수 출토되었으며, 이외에도 난간석을 포함한 2800여 점의 석재가 발견되었다. 특히, 다리의 흔들림을 방지하기 위해 사용된 ‘돌못’은 신라의 정교한 기술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로 평가받는다. 현재 복원된 월정교는 이러한 발굴 자료와 《삼국사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원형에 가깝게 재현되었다.
월정교와 원효스님 이야기
태종 무열왕때 당시 위대한 원효스님은 스승없이 혼자서 깨달음에 이르신 분으로 80여권을 책을 집필하였는데 무열왕(김춘추)은 원효승이 여인을 얻으면 신라를 위해 큰 인물을 낳을 수 있겠다 생각했다. 무열왕에게는 마침 남편이였던 화랑이 전쟁에 나가 죽게되면서 과부가 된 딸 요석공주가 있었고 원효스님을 궁궐로 부르게 된다. 그런데 원효스님이 월정교 앞 나무다리(유교)에서 물에 빠지게 된다. 그 젖은 옷을 말리기 위해 궁궐에 3일간 머무르게 되는데 그때 요석공주가 있는 요석궁(지금의 경주 향교 자리) 으로 가서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 이후 요석공주는 원효대사의 아이를 가지게 되고 둘 사이에 아이가 설총이다.
월정교 옆에는 교촌마을이 있는 그 안쪽에 경주 최씨 종가(최부자댁)가 있다. 바깥쪽으로 요석궁이라는 음식점이 보이는데 그 자리가 요석궁자리였다는 학자도 있고 경주 최씨 집안 자리가 요석궁 자리였다는 사람들도 있다.
원효스님은 요석공주와의 사이에 아이를 낳고 스스로 계율을 어겼다고 하면서 스님들의 옷인 법복을 버리고 스스로를 소성거사라 부르며 자신을 낮추며 생활했다.
두 번째는 김유신과 천관사의 신녀 이야기가 있다. 김유신이 통일에 대한 대업을 이루기 전 깊이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다. 월정교 서쪽 도당산에 있던 천관사 절에 있던 신녀로 김유신은 이 여인을 보기 위해 유교 다리를 수시로 건너 신녀를 만나러 갔다. 부모님의 반대에도 김유신은 신녀를 계속 만났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에게 큰 꾸지람을 들은 김유신은 더이상 신녀를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였지만 너무 보고 싶어 술을 많이 먹고 취하게 되었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말이 자신을 천관사 앞에 데려왔던 것이다. 이에 김유신은 자신의 말의 목을 잘라버렸다고 한다.
삼국사기 속 월정교
삼국사기 경덕왕 편에는 760년경 2월 궁궐안에 큰 연못을 파고 궁궐 남쪽 문천 위에 월정과 춘양 두 다리를 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문천은 월정교 아래 흐르는 물을 말한다. 월정교는 궁궐 서쪽에 위치해 ‘달(月)’을 상징하며, 춘양교는 동쪽에 위치해 ‘해(日)’를 상징했다. (춘양교) 일정교는 현재 없어졌으나 월정교는 복원되어 신라의 찬란했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유산이 되었다.
월정교와 남산, 그리고 신라의 불국정신
월정교는 단순히 물리적인 연결을 넘어 신라 백성들의 종교적 염원을 상징하는 다리였다. 월정교가 궁과 연결된 남산은 신라 백성들에게 성스러운 산으로 여겨졌고, 월정교를 통해 남산으로 가는 길은 마치 불국정토로 향하는 길처럼 여겨졌다. 복원된 월정교는 이러한 신라의 종교적 정신을 현대에 다시 불러오며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월정교와 주변 명소
월정교는 오늘날 경주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다리 옆에 위치한 교촌마을에는 경주 최씨 종가(최부자댁)가 자리하고 있으며, 이곳은 신라 시대와 조선 시대의 문화를 모두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장소이다. 또한, 요석궁이라는 음식점 자리 역시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이야기가 깃든 곳으로 전해지며, 경주의 역사와 이야기를 탐방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이다.
'Korean Hi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균 칠천량 해전 : 조선 수군 역사상 최악의 참패 (0) | 2024.12.17 |
---|---|
김신조 사건 : 1968년 1.21 사태 - 김신조는 왜 목사가 되었을까? (2) | 2024.12.16 |
국립경주박물관 3 전시실 (0) | 2024.10.09 |
경주 최부자집 최진립 장군 - 독립운동가 최준까지 400년 역사..대구대는 왜 영남대가 되었나? (0) | 2024.09.30 |
우리나라 한국 최초 해수욕장 : 부산 송도해수욕장 ,한국 해수욕 문화 시작? (0) | 2024.09.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