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과 고려는 태조 왕건때부터 악연이 시작된다. 당시 조선은 거란을 야만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만부교 사건으로 거란과 고려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993년 고려가 건국된지 75년 되는 해로 이때가 고려 건국이래 처음으로 외세의 침략을 받았고 앞으로 27년 동안 거란의 큰 공격만 3 차례를 받게 된다. 거란과의 봉산군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선봉군 대장마저 포로로 붙잡혀 있던 상황이었다. 이후 안융진 전투가 벌어지고 이번에는 고려군이 승리하면서 다급해진 거란 장수 소손녕은 초조해지면서 협상을 제안한다.
당시 고려의 대신들은 고려 영토의 일부를 내놓자고 했으나 서희가 이를 반대하며 소손녕을 만나러 갔다. 소손녕은 고려를 신라를 계승한 땅이라고 말했고 이에 서희는 그에 대한 반박을 한다.
서희가 파악한 거란 의도
고려가 옛 고구려 땅을 침범했고 고려가 송나라와 친하게 지내고 거란을 적대시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고려와 송나라는 조공 책봉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래서 거란의 1차 목표는 고려와 송의 국교 단절이었다.
서희는 여진을 쫓아내고 옛 영토를 돌려준다면 거란과 통교하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강동 6주를 얻게 된다.
강동 6주의 중요성
강동 6주란 압록강 동쪽의 6개 주로 청천강 이북과 압록강 이남 6개 지역 흥화진, 용주, 철주, 통주, 곽주, 귀주 이다. 지금의 평안북도 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지이다. 300년 만에 고구려 영토를 회복한 것으로 담판 이후 약 2년 동안 여진이 활동하던 지역을 고려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성을 쌓은 뒤 대규모로 주민을 이주시켜 정착하게 했고 이후 고려의 북방 방어 기지 역할을 하는 곳이 되었다. 그 후에도 귀주대첩도 강동 6주 가운데 하나였던 곳이고 1231년 몽골군의 침략을 막아낸 곳도 강동 6주 지역이었다.
강동 6주를 개척하지 않았다면 거란 2차 침입 때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수 있다. 서희의 강동 6주 획득은 오늘날의 한반도 북방경계선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의 실리외교
고려가 송과 친교를 맺은 이유는 송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고려를 발전시키기 위함이었다. 거란의 압박때문에 송과의 외교를 단절해야하는 상황을 송에 사신을 보내 전했다. 거란의 압박으로 거란에 어쩔수 없이 사대를 하게 되었고 이런 상황이니 송이 고려를 구원해줬으면 좋겠다고 원군 요청을 한 것이다. 당시 송은 거란과 전쟁을 벌이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예상했던 대로 송은 고려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렇게 되니 송은 고려가 송과 관계를 끊은것에 대해 할말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거란과 국교하지만 비공식적으로 송과 교류의 여지를 남겨 놓은 외교술이었다.
서희의 죽음
외교 담판 후 거란은 서희를 통해 송과 외교를 단절하겠다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갔고 서희 편에 낙타 열 마리 말 1백 필 양 천마리 선물까지 보냈다. 그러나 서희는 담판 5년 뒤 57세의 나이로 개국사에서 병들어 998년 사망한다. 2차 거란 침입때는 서희는 없었다. [그날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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