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orean History

천추태후 이야기

고려 천추태후는 태조 왕건의 손녀딸, 5대 경종의 후비, 6대 성종의 여동생이며 7대 목종의 어머니, 8대 현종의 이모가 된다. 고려시대 5,6,7,8 대 왕이 천추태후라는 인물을 거치지 않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고려 초기 12년간 섭정을 했고 외척과 간통해 악날한 왕으로 그려져 있다. 천추태후에 대한 이야기는 고려사에 나온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고려사는 조선 전기 유학자들의 성리학적 관점으로 서술한 기록이다. 

 

천추태후 가계도

 

 

천추태후라 불린 이유

천추태후가 거쳐했던 곳이 천추궁이였다. 아들 목종이 즉위하고 자신이 기거하던 수강궁 한켠에 어머니만을 위한 독채 천추궁을 만들어줬다. 천추는 천년의 가을이란 뜻으로 만수무강의 의미 아주 오랜 기간을 의미한다. 그래서 천추궁에 있는 태후라는 뜻에서 천추태후라고 부른다. 고려시대 태후는 조선시대 대비와 같은 것이다.  천추태후가 왕후 시절 호칭은 헌애왕후, 대비 시절 호칭은 천추태후이다. 

 

고려 왕실의 특징

천추태후는 아버지 왕욱과 어머니 선의왕후 사이에 태어났다. 아버지 왕욱, 선의왕후는 모두 태조 왕건의 자녀들이다. 왕건의 자녀가 근친혼을 통해 천추태후를 낳은 것이다. 천추태후가 13살이 되던 976년 사촌 오빠 고려 5대왕 경종과 결혼을 한다. 경종의 3번째 비 헌애왕후 황보씨(=천추태후)로 불렀고 경종은 뒤이어 천추태후의 여동생 헌정왕후 황보씨를 4번째 비로 맞았다.  자매가 동시에 한 왕의 비가 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경종은 왕건의 손자, 헌애왕후 황보씨 자매도 왕건의 손녀라는 것이다.  이들의 혼인은 사촌간에 이루어진 근친혼이었다.

 

드라마에서는 한날 한시에 결혼한 것으로 나오나 동시에 결혼했는지는 알수 없다. 

 

고려 8대 왕 현까지는 거의 근친혼을 했다. 태조 왕건의 4째 아들이자 고려 4대왕 광종은 그의 누이 태목왕태후 황보씨를 첫째 비로 맞았다. 광종의 둘째 비는 혜종(태조 첫째 아들)의 딸 즉 조카였다. 

당시 고려 왕실의 특징은 태조 왕건의 핏줄끼리 결혼하는 족내혼을 했는데 딸들은 왕씨 성을 피해 할머니의 성을 따랐다. 그래서 헌애왕후 황보씨는 할머니 황주 호족 신정왕태후 황보씨의 성을 따라 헌애왕후 황보씨가 된 것이다.  고려시대 근친혼은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던 하나의 풍습이었다. 특히 고려 왕실에서는 철저하게 근친혼을 따랐고 고려왕 34명 중 19명이 같은 왕족과 결혼한 근친혼이었다.  고려사회가 하나의 호족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자신의 정치 세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근친혼의 방식을 취했다. 

 

 

 

천추태후는 왕건의 손녀이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지방 호족세력의 외손녀였고 경종의 다섯왕비 중 가장 먼저 아들을 낳았다. 그녀의 아들이 경종의 유일한 아들이자 장차 왕위를 이을 아들(왕송)이었다. 그러나 981년 경종은 천추태후가 아들을 낳은지 불과 1년만에 사망한다.  당시 천추태후는 겨우 18세였다.  또한 그녀의 아들은 2살이었다. 

 

천추태후와 김치양

천추태후의 아들이 너무 어려 경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이는 천추태후의 친오빠 성종(왕치)이었다. 천추태후의 아들은 왕위 계승 1순위로 성종이 있는 궁에서 자라게 되었고 천추태후는 홀로 궁을 나가서 아들과 떨어져 지내기 된다. 이때 그녀에게 승려 김치양이 나타난다. 김치양은 천추태후의 외척이었다. 김치양은 태후가 머물던 천추궁에 출입하면서 천추태후와 정을 나누게 된다. 고려때 여인의 재혼과 이혼은 비교적 자유로웠으나 왕실 여인의 경우 왕씨가 아닌 남자와의 만남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이에 성종은 김치양을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낸다. 또한 천추태후의 여동생 헌정왕후가 자신의 숙부 왕욱(유부남)과 사랑에 빠지니 왕욱은 유배를 가게되고 헌정왕후는 갑자기 아이를 낳다가 죽게 된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대량원군 왕순이었다.  성종은 유교적 국가를 추구했던 왕이었기에 이를 용납할수 없었다. 

 

천추태후 섭정 

997년 38살 성종이 승하하고 천추태후의 아들 목종이 왕이 된다. 당시 목종의 나이 18세였으나 천추태후는 목종 대신 섭정을 한 것으로 그녀의 강한 권력욕을 시사한다. 

 

천추태후와 목종

 

그리고 천추태후는 귀양 중이던 김치양을 다시 불러들인다.  천추태후의 섭정 시기 그녀의 연고지였던 황주 사람들이 대거 정계에 진출하게 되고 동주 출신 김치양 그를 통해 자신의 황주 세력권을 확장을 시도하려 했던 것이다.  김치양을 불러들인 후 관직에 임명하며 오늘날 장관직까지 초고속 승진을 시킨다. 

 

 

 

천추태후 조카에게 자객을 보내다.  

천추태후의 아들 목종 재위 6년 아직까지 후사가 없었다. 또한 목종이 여자가 아닌 남자를 가까이 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런 와중에 나이 40세 1003년 천추태후와 김치양 사이에 아들이 탄생한다. 이에 천추태후는 자신의 동생 헌정왕후의 아들이자 순수혈통으로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될것 같은 조카 대량원군을 강제로 절에 보낸다. 이후 대량원군에서 술과 떡을 보내 대량원군을 독살하려했으나 진관스님의 도움으로 대량원군은 목숨을 구한다. 

 

▷진관사 이야기  

 

이후에도 여러차례 대량원군 왕순을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냈으나 번번히 실패한다. 

강조의 미스터리 정변 

1009년 궁궐에서 성대한 연등행사가 진행 중이었고 그날 밤 천추전에 화재가 발생하여 잿더미가 된다. 목종은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아 궁궐을 패쇄한다. 왕이 비탄에 빠져 정무조차 보지 못했다. 목종이 몸져눕자 왕위 찬탈을 꾀한 천추태후와 김치양을 목종이 눈치채고 신변의 위협을 느껴 호위를 위해 강조를 부르게 되고 그 과정에서 강조는 다시 정변을 일으키게 된다.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원군을 새로운 왕(고려 8대왕 현종) 으로 세운 강조였다. 정변 성공 후 강조는 고려의 1인자로 등극한다. 

 

강조가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목종을 폐위하려던 것이 아니였다. 각기 다른 이유로 강조의 군사를 이용하려던 두 세력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다가 마지막으로 일으킨 군대를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서 목종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면 죽을 수 있다는 판단으로 죽음을 면하기 위해 목종 폐위라는 극단적인 결정을 했던 것이다.  강조의 변은 고려 건국 최초 신하가 왕을 쫓아낸 사건으로 매우 커다란 사건이었다. 

 

 

 

 

천추태후의 최후

목종과 함께 천추태후도 궁궐에서 강조에 의해 쫓겨난다. 김치양과 그의 아들은 처형당한다. 천추태후와 함께 권력 찬탈에 참여했던 친속 30여 명도 섬으로 유배된다.  12년간 화려한 권세를 누렸던 천추태후는 강조에게 말 한필을 받고 쫓겨난다. 그후 강조가 보낸 부하에게 파주 적성현에서 목종은 30살에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천추태후는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1029년 천추태후가 처음 왕비가 되었을때 거쳐하던 숭덕궁에서 66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천추태후의 마지막은 초라하지 않았다. 쫓겨난 왕후답지 않게 성대한 능에 묻혔다. 

 

천추태후 실각 후 

천추태후의 실각 후 현종의 즉위는 고려 초 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고려 건국 지방 세력 호족의 시대가 끝나고 중앙 관직 진출의 귀족의 시대가 열리는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전통적인 족내혼, 근친혼이 사라지게 되고 타성 혼인이 시작된다. 그리고 성종의 정치를 현종이 계승하면서 유교정치이념이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그날 121]

 

연천 당포성과 숭의전 속 고려 왕건의 후삼국 통일과정

 

연천 당포성과 숭의전 속 고려 왕건의 후삼국 통일과정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57-1회] 오늘의 탐사지: 경기도 연천 주제: 후삼국 통일 과정 출연자: 설민석 , 최수종 경기도연천 연천 당포성 고구려의 방어성 중에 하나였으나 지금은 성곽의 일부만

jangane.tistory.com

 

거란 역사 (요나라 야율아보기, 야율융서 ) 135 (tistory.com)

 

거란 역사 (요나라 야율아보기, 야율융서 ) 135

거란은 북방 민족 중에 최초로 중국 대륙의 일부를 점령하며 최초의 정복왕조로 불린 대제국을 건설했다. 거란이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약 300년대 중반 약 4세기 중반부터이다. 거란은 중

jangane.tistory.com

만부교 낙타 사건

 

만부교 낙타 사건

918년 고려가 건국되고 10세기 초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던 시기 한반도 서북쪽 시라무렌강 일대에 유목민들의 나라 거란이 세워진다. 훗날 926년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킨다. 약 8년간 고려와 발해

myvoice.wissu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