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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105인 사건 : 신민회 해산을 위해 일제가 날조한 것은?

지속적인 구국활동에도 자주독립국가의 길은 멀기만 했다. 1905년 일제에 의한 강제 외교권 박탈과 통관부 설치로 내정을 장악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고 1907년 고종은 네덜란드 제 2차 평화 박람회에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사건이 들켜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위당한다.  1910년 경술국치의 한일 합병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국권 상실에 이르게 된다. 

 

 

105인 사건 

1911년 조선총독부는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을 사전에 탄압하기 위해 데라우치 마사다케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빌미로 독립운동가 600여 명을 검거한다. 아래 사진은 1911년 9월 공판정으로 끌려가는 신민회 인사들이다.  이 당시 죄수가 밖으로 나갈때 반드시 용수를 썻던 것이다. 

 

용수를 쓰고 있는 신민회 인물들 /* 원래 용수의 목적은 술을 내릴 때 거름망으로 사용하는 통발이다.

 

1910년 8월 29일 한일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되고 그로부터 약 3개월 후 일본에서 압록강 철교 준공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때 준공식 참석을 위해 데라우치 총독이 압록강 인근을 방문하게 되고 신민회 회원이 총독을 암살하려 모의했다고 주장하면서 총독 암살 미수죄로 123명을 기소하고 1심에서 105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다. 이것을 105인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은 일제강점기 기간에 최대의 구속사건이었다. 

 

 

 

일제는 신민회 회원이 몇명인지 정확하게 알지못했으나 신민회 지도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이때 윤치호, 양기탁, 이동휘, 김구등이 모두 끌려왔고 함께 활동했었던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 선생이 체포가 안되어 있었는데 끌려가던 사람들을 보고 고개를 돌려 눈물을 훔치고 있던 순간을 포착해 이승훈 선생이 신민회 회원임을 밝혀내 체포했다.  신석규는 체포 후 열차로 호송 중 맨몸으로 투신하여 생을 마감했다. 

 

 

데라우치 총독 암살 날조 사건 

데라우치 총독 암살 사건은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다.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후 위험한 단체를 물색하던 중 신민회가 눈에 띄었고 이에 일제는 이 날조를 통해 이들을 한번에 잡아들이려고 했던 것이다. 물증, 증인이 없는데 자백을 통해 하지도 않은 일을 자백받으려고 하니 혹독한 고문이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고문을 견디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거짓으로 자백을 하게 되고 고문 도중 사망하거나 트라우마를 호소하기도 했다.  유죄판결을 받은 105명은 항소심을 신청하게 되고 여기서 많이 무죄가 되어 99명이 무죄를 받게 된다.  단 6명만 유죄를 받게 되고 6인에게 5~6년 선고를 받는다. 

 

 

이 결과는 대규모 소송단이 결성되었다. 18인의 변호인단이 결정되어 8명이 조선인 변호사가 있었다. 조선인 변호사는 물론 일본인 변호사와 외국인 선교사 등 많은 사람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 대부분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신민회는 어떤 단체? 

독립협회 이후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신민회는 1907년에 만들어진 비밀결사단체로 정확한 회원수는 확인불가이다. 대략 800명 정도로 얘기하지만 공판장에서 일본이 조작한 숫자로 숫자의 많고 적음은 정확히 모르고 있다. 신민회 회원수에 대한 유일한 기록은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300명을 모았다는 기록이 하나있다. 

 

 

도산 안창호

 

이 숫자는 과거 독립운동을 했던 양기탁 중심의 대한매일 신보 그룹, 이동휘를 위시한 대한제국군인 그룹,  전덕기, 이승훈, 김를 중심으로 모인 상동청년회 그룹등 여러 그룹이 단기간에 결집이 되어 독립운동을 위한 사람들이 총집합된 단체가 신민회였다. 

 

신민회의 구성원은 주로 엘리트, 지식인, 시민계급 인사가 70%의 대부분이였고 한 나라를 식민화 할때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이 해당 국가의 지식인을 처단하는 것이다. 이후의 독립운동은 해외에서 이어나갔고 만주 일대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미주지역과 간도, 상하이 지역의 교민을 연결하는 등 새로운 조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1910년에 국내외적으로 독립운동의 특별한 활동을 찾기 힘들지만 이것이 토대가 되어 1919년 3.1운동으로 표출되어 민의와 준비된 독립운동가들이 결합하면서 이후 임시정부 등을 통한 독립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