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썸네일형 리스트형 프랑스 라스코 동굴 벽화 1940년 이 동네에 살던 어린 꼬마들이 잃어버린 강아지를 찾으러 다니다가 조그만한 구멍이 있어 들어갔는데 그곳에 동굴벽화가 있었다. 이것이 라스코 동굴 벽화였다. 라스코 동굴 벽화는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하는데 무려 380개의 이미지가 그려젼 황소의 방이다. 이 그림은 무려 1만 7천 년전에 그려진 구석기 시대 그림으로 밝혀졌다. 그림을 그린 방식이 속이 빈 동물 뼈를 활용해 입에 물고 있던 물감을 불어서 벽에 색을 입혔던 것으로 추정한다. 두 황소가 싸울 듯이 마주 보고 있는 그림이 있는데 이 황소는 스페인 투우의 조상 격인 '오록스' 라는 소로 지금은 멸종된 종이다. 물감은 흙과 다양한 색의 돌 등을 활용해 물감으로 사용했다. 만 3천년전 산사태로 동굴 입구가 막히면서 습도, 온도에 영향을.. 더보기 경주 월정교 천년의 다리에 숨은 비밀 경주를 걷다 보면, 마치 신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주는 장소가 있다. 바로 월정교이다. 처음 이 다리가 세워졌을 때는 단순히 강을 건너기 위한 교량이 아니었다. 궁성과 마을을 잇는 다리이자 신라인들의 문화와 예술이 깃든 장소로, 당시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그 아래 강바닥에 숨겨진 기술적 비밀과 월정교를 둘러싼 전설들은 오늘날에도 경주를 찾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월정교의 뜻과 기원월정교(月精橋)의 이름은 "달의 정수가 흐르는 다리"라는 뜻으로, 신라의 예술적 상상력을 담고 있다. 이 다리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년) 시기에 처음 세워졌다고 한다. 다리는 궁성과 외곽을 연결하며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했으며, 동시에 신라 귀족들의 정원.. 더보기 국립경주박물관 3 전시실 ▶국립 경주 박물관 2 전시실 3실은 신라의 강력한 왕권과 삼국통일 이후 본격적으로 꽃피우기 시작한 통일신라의 문화를 다루고 있다. 2실은 제정일치 시대로 정치와 신앙을 한사람이 주관했다. 3실은 정치와 신앙이 분리되어 신라가 법을 만들고 제도를 정비하면서 왕을 중심으로 중앙 집권 국가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있다 . 3-1실 포항 중성리 신라비 포항 중성리 신라비는 2009년 5월에 경북 포항에서 발견된 것으로 현존하는 신라 시대 비석 중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으로 당시 재물 소송과 판결이 기록되어 있다. 비석에 새겨진 글씨가 아직도 선명해 읽을 수가 있다. 이 비석은 도로 공사를 하던 한 인부가 파올려진 돌을 자신의 집 화분받침으로 사용하기 위해 이 돌을 집에 가져갔다. 그리고 흙이.. 더보기 국립경주 박물관 1 전시실. 성덕대왕 신종 이야기 성덕대왕 신종 이야기고구려의 강인함, 백제의 우아함, 신라의 화려함 , 삼국의 문화를 통합한 것이 통일신라이다. 통일신라는 영토를 통일한것 뿐만아니라 고구려와 백제 양국의 뛰어난 문화를 흡수한 문화이기도myvoice.wissue.net 신라 역사관 1 전시관 동선 신라가 건국하기 전의 삶과 신라 초기 나라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한 시의 모습을 엿볼수 있는 공간이다. 선사시대 돌도끼를 쓰던 경주 일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집단을 이루고 사회. 정치적으로 성장해 국가를 세웠는지 배울 수 있다. 신라 사람들은 다양한 모양의 토기를 만들었는데 토기를 통해서 신라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짐작할수 있다. 빗살무늬 토기는 신석기 대표 유물로 주로 강가에서 발견, 인류 최초의 발명품 토기, 빗.. 더보기 원주 뮤지엄 산 투어 뮤지엄 산은 1997년부터 운영되어 오던 종이 박물관(페이퍼갤러리)과 2013년 개관한 미술관(청조 갤러리)으로 이루어진 종합 뮤지엄으로 8년에 걸쳐 지어진 곳이다. 세계적인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이 박물관은 미니멀리즘 스타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있다. 들어가는 입구 주차장부터 독특하다. 뮤지엄 산은 강원도 원주에 위치한 아주 특별한 박물관이다. 산속에 위치해 있고, "SAN"은 한국어로 산을 뜻하면서, 동시에 "Space, Art, Nature"를 의미한다. 이 박물관은 자연과 예술, 건축을 완벽하게 조화시킨 곳으로 유명하며 뮤지엄산의 건축 특징은 여백의 미이다. 뮤지엄 산은 코스에 따라 티켓의 금액과 소요시간이 다르다. 입장권 종류 기본권 23000원 : 야외가든+ 종이.. 더보기 게르만인의 대이동 -> 서로마 제국 멸망 (로마 제국 몰락 역사) 171-4 [이전글] 171-3 로마제국 멸망 이유: 콤모두드 ~ 콘스탄티누스 황제 게르만인은 누구? 로마제국의 멸망 이유 중 하나가 게르만인의 대이동이 있었다. 게르만인은 게르마니아라고 부른 지역에 살았던 고트족,반달족,앵글로색슨족, 프랑크족 등 모든 이민족을 말한다. 게르만인은 민족이 아니라 집단과 같은 성격으로 게르만인을 무시하는 의미로 통칭해서 부른 것이다. 고트족 - 오늘날 스페인, 이탈리아 지역에서 이주 및 정착한 부족반달족- 오늘날 알제리, 튀니지 지역에 이주 및 정착해 반달 왕국 세움. 문화 파괴 행위인 반달리즘의 유래가 된 부족앵글로 색슨족 - 오늘날 영국에 이주 및 정착한 부족프랑크족- 오늘날 프랑스, 서독일 북이탈리아 지역에 이주 및 정착한 부족 게르만인 거주 지역 게르만인의 거주 지역이.. 더보기 로마 최고의 전성기 오현제 시대 171-2 [이전글]로마의 시작 , 로마 1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171-1오현제 시대 [팍스 로마나]아우구스투스의 시대부터 약 200년간 로마의 평화가 이어지는 팍스 로마나 시대가 열렸고 이후 최고의 로마 황금기를 이끈 오현제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오현제란 로마의 황금기를 이끈 현명한 5명의 황제를 말한다. 이들은 로마제국이 최고의 전성기를 누릴 수 있게 안정적으로 운영했다. 12대 황제 네르바 오현제 시대 이전 로마 제국은 후계자 문제로 혼란기를 맞았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대부분 혈육에게 황위를 물려주는 황제 세습제를 따랐던 황제들은 능력보다 핏줄로 황제가 되다보니 폭군이 발생하거나 무능한 황제들이 즉위하는 문제가 생겼다. 이때 네르바는 무너진 사회와 정치 체제를 바로 잡으며 오현제 시대의 문을 열었다. .. 더보기 로마 제국의 시작 , 로마 1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제정 시대) 171-1 [이전글] 로마 공화정 시대 역사 2 전체 로마의 역사는 기원전 753년부터 서기 1453년까지로 2천 2백 년이 넘을 정도로 길고 방대하다. 고대 로마는 산탄렐로성, 콜로세움, 아스펜도스 원형극장 등 로마의 건축은 현재까지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재도 사용되는 돔, 아치, 모자이크등 로마의 건축 및 예술양식도 로마에서 왔고 로마의 국교였던 기독교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퍼져있다. 또한 2천여 년 동안 다양한 정치 체제를 거친 로마의 역사는 현대 정치 체제의 기초가 되었다. SPQR 뜻 로마 곳곳에서 볼 수 있는 SPQR은 로마사에서 중요한 표어로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이라는 뜻이다. 고대 로마는 정치엘리트 원로원과 시민이 운영하는 공화정 체제로 발전했다. 로마곳곳에서 볼수 있는 SP.. 더보기 경주 최부자집 최진립 장군 - 독립운동가 최준까지 400년 역사..대구대는 왜 영남대가 되었나? 최부잣집 경주에 가면 월정교 근처 교촌마을이 있는데 경주 최씨 종가가 있는 마을이다. 동학의 발원지로 최진립 장군은 두 번의 국란에 모두 참가한 장군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며, 정유재란때는 권율과 함께 울산 서생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최진립의 시조는 신라 문장가 최치원 선생으로 경주 최씨의 시조격이다. 사실 경주 최부자집은 지금도 유명하다. 12대에 걸쳐 400년간 부와 명예를 지킨 명가이다. 최진립 장군은 누구?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는 용산서원이 있다. 최부자집의 중시조격인 최진립 장군을 모신 서원이다. 무신으로서 향사된 경우는 극히 드물어 이순신 장군 이외에는 없다. 최진립은 1568년 무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최진립 장군은 1592년 임진왜란 때 25세의 나이에 의병을 이끌고 싸.. 더보기 우리나라 한국 최초 해수욕장 : 부산 송도해수욕장 ,한국 해수욕 문화 시작? 부산항이 개항이 되지 많은 사람들이 부산으로 몰리게 되었다. 그런데 여름이 되면 유독 손님이 끊어졌는데 개항시기 부산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와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조선인들에게 해수욕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로 다 큰 성인 남녀가 바닷가에 헐벗고 들어가서 해수욕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던 때였다. 한국 해수욕 문화 언제부터? 이때 부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해수욕 문화를 이미 받아들인 상태였고 지금의 자갈치 시장 일대 남빈 해변이라는 곳에서 해수욕을 즐겼다. 이를 본 조선 사람들은 "대낮에 어떻게 남녀가 부끄러움도 없어 저럴수 있느냐" 며 놀랐다. 어린 아이들도 남빈 해변에 가면 상스러운 것을 배운다고 일본인 거류지로 출입하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그래서 부산 일본인 거류지역은 여름.. 더보기 이전 1 ··· 11 12 13 14 15 16 17 ··· 6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