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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벌거벗은 한국사

장녹수 연산군의 총애를 어떻게 얻었나? 그녀의 최후는? 70

 

조선 왕조 10대 왕이자 폭군의 대명사 연산군의 후궁이었던 장녹수는 궁궐에 들어오기 전 기생이었다. 기생 장녹수는 어떻게 폭군 연산군의 마음을 얻었을까? 

 

1502년 연산군 8년은 연산군의 폭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이다. 연산군은 조선팔도 춤, 노래, 미녀를 색출해 궁궐로 불러들여 음주, 가무를 즐기려 했던 것이다. 이런 가무기생들에게 '운평'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운평 중에서도 뛰어난 이들을 선별해 '흥청'이라고 불렀다. 

 

장녹수는 운평으로 뽑히는 과정 없이 바로 흥청이 된다. 당시 연산군은 예술에 있어서 누구보다 예민한 눈과 귀를 가진 왕이었기 때문에 타고난 감수성이 풍부했던 연산군은 자신의 시집을 내기도 하고 가면을 쓰고 추는 처용무에도 능했다. 그래서 자기처럼 예술적 기질이 뛰어난 장녹수에게 끌렸던 것이다. 또한 장녹수의 동안 외모도 연산군에게 눈에 띄었다. 당시 26세의 연산군보다 연상이었던 장녹수였으나 타고난 노래실력을 갖춘 동안의 외모로 연산군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장녹수는 어떻게 기생이 되었나? 

장녹수 아버지의 이름은 장한필이었다. 충청도 문의현에서 사또직을 지낸 양반이었다.  그러나 장녹수의 친언니 남편은 노비였고 이 사례로 볼 때 장녹수의 어머니가 관비를 지낸 천민 출신으로 추정된다. 당시 조선은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가게 돼있었기 때문에 장녹수 또한 노비였다. 그러나 노비가 되기 전 장녹수의 생활은 더욱 처참했다. 찢어질 듯한 가난 때문에 몸까지 팔아가며 살아야 했던 장녹수였다. 게다가 장녹수는 시집을 여러 번 갔다. 그러다 결국 제안대군의 남자 노비와 혼인해 사노비가 된 장녹수였다. 그 힘들 삶에서 제안대군 남자노비의 아들까지 낳으면서 점점 더 생활은 어려워졌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노래와 춤을 배워 기생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렇게 장녹수는 사노비인 동시에 기생이 되었다. 

 

제안대군의 연회에서 장녹수는 연산군을 만나게 되고 왕의 선택을 받아 흥청이 되어 궁궐에 들어가게 된다.  장녹수가 입궁한 그해 장녹수는 종 4품 숙원에 정식 책봉되어 연산궁의 후궁으로 신분이 상승된다. 장녹수에게는 연산군을 사로잡는 결정적 무기가 있었다. 

 

 

장녹수는 연산군에게 무례하게 행동했으나 연산군의 그녀의 이런 행동을 모두 받아주었다. 연산군은 애정결핍이 심한 상황이었고 자신을 아들처럼 편하게 대하는 장녹수에게 어머니의 모습을 보지 않았을까로 추정한다. 장녹수는 입궁한 바로 그해 왕의 아이를 잉태하게 되고 장녹수는 무사히 딸을 출산한다. 연산군은 장녹수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영수를 애지중지 아꼈다. 그리고 입궁 1년 만에 종 3품 숙용으로 승진하게 되고 연산군의 총애로 자신의 재산을 엄청난 규모로 불려 나간다.  

 

 

갑자사화

그러던 어느날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 씨가 사사된 사실을 알고 윤 씨 죽음과 관련된 사람들을 숙청하기 시작한다.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의 무시무시한 공포정치가 시작된다. 이때부터 신료들은 더 이상 간언할 수 없게 된다. 이때쯤 장녹수는 두 궁녀를 시기하여 연산군을 이용해 그들을 죽이니 신료들은 연산군뿐만 아니라 장녹수의 눈치까지 봐야 될 상황이 된 것이다. 

 

 

 

장녹수의 최후 

장녹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연산군 비위 맞추기에 몰두했고 입궁 후 4년 동안 연산군에게 편안한 쉼터가 된다. 그러면서 연산군의 기행은 계속되었고 나라의 기강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러던 1506년 9월 2일 동이 트기 전 캄캄한 새벽 갑자가 장녹수의 처소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연산군의 거듭된 폭정에 신료들이 반정을 일으킨 것이다.

 

 

중정반정으로 순식간에 궁궐을 장악한 반정 세력이었다.  모두가 연산군을 버리고 도망칠 때 끝까지 곁에 남기로 한 장녹수는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참수형을 당한다. 공개처형 후 장녹수의 시신은 길바닥에 버려지고 분노한 백성들이 장녹수를 향해서 돌을 던졌고 이 돌이 무덤을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연산군이 폐위된 후 강화 교동로로 유배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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