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새로운 조선을 꿈꾸며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김옥균은 상하이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또한 조선으로 돌아온 김옥균의 시신은 돌아온 후 능지처참을 당한다.
운요호 사건 결과
1875년 일본의 운요호가 불법으로 강화도에 침투, 강화도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1876년 일본은 이것을 빌미로 조선에 개항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렇게 강화도 조약이 맺어지고 이에 조선은 처음으로 부산, 원산, 인천의 항구를 순차적으로 개항했다. 조약 이후 세계 열강들과도 통상 수교를 맺게 되었다.
서양 열강이 조선의 개항을 요구했던 이유는 일본은 대륙 침략의 목적이 있었고 미국은 동북아시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거점 확보, 청나라는 조선 식민지화, 러시아는 부동항 확보후 아시아 침략 계획이 있었고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조선을 침략하려던 열강들이다.
통리기무아문 설치
당시 고종의 생각은 선진문물을 빨리 받아들여 군사적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종과 뜻을 함께 했던 개화사상을 가진 신진 관료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김옥균이였고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 고종은 통리기무아문을 설립한다. 통리기무아문 산하에는 12개의 부서가 있었고 체계적으로 근대화 업무를 담당했다. 고종은 특히 통리기무아문을 통한 군대 양성에 힘쓴다. 신식 군대 별기군을 창설한다. 별기군은 일본인 교관을 통해 근대식 군사 훈련을 받았고 소총같은 신식 무기까지 제공된다.
임오군란
그러던 1881년 고종은 김옥균을 급하게 부른다. 12월 근대화된 선진문물을 배우기 위해 일본의 도교와 나가사키로 가게 된다. 천황을 중심으로 입헌군주제를 통해 근대화를 이루고 있던 일본이었다. 이때 김옥균은 그들의 근대화에 충격을 받고 조선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조선의 군대가 난을 일으켜서 창덕궁 궁궐까지 침입했다는 것이다. 13개월의 임금체납 후 그들이 받은 것은 겨와 모래가 섞인 쌀이였고 이에 별기군 교관인 일본인들을 죽이기까지 하고 일본공사관도 불태워 버린다.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임오군란 결과
이후 흥선대원군이 다시 집권하게 되고 그는 고종과 정반대의 정책을 펼치며 별기군과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했던 것이다. 이에 고종은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하고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3천명의 군인을 들인다. 그리고 청나라 텐진으로 흥선대원군을 납치해버렸다. 창덕궁의 구식군을 몰아내고 도망갔던 명성황후도 2달만에 다시 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임오군란 이후에도 청나라 군대는 돌아갈 기미가 없고 내정간섭을 하고 있는 청나라였다.
제물포 조약 체결
이에 일본도 임오군란의 사후 처리를 위해 제물포 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고 이 조약에는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빌미로 일본군을 파병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공사관 수비대라는 명목으로 천명이 넘는 군대를 주둔시킨 일본이었다. 이에 조선도 친청 온건화파와 친일의 급진개화파로 나뉘게 되고 친청 세력이 득세한 조정에서 김옥균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 즈음 1882년 8월에 조선과 청은 수륙 양면에 걸친 통상에 관한 규정인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한다. 조약의 내용 중 김옥균을 분노케한 부분이 있었다. '속방'이라는 단어였다.
한마디로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정의한 것이다. 이에 김옥균은 분노하여 군대 양성 및 도로 정비등 각종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지만 온건개화파의 방해로 모두 실패한다. 좌절한 김옥균은 정변을 계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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