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의 판도를 바꿔버린 인천상륙작전으로 북진한 유엔군. 통일이 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중국군의 개입. 중국군은 전투에 자신이 있었다. 첫번째는 인해전술로 대규모 병력으로 자신이 있었고 또한 이들은 이미 자국에서 국공 내전을 통해 풍부한 전쟁경험도 있었다.
정전협정 회담 장소
막상 6.25전쟁에 들어와보니 유엔군의 막강한 화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중공군이었다. 이에 무력으로 인한 종전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중공군은 정전협상 테이블에 앉게 된다. 그래서 정전회담 첫 장소를 개성의 내봉장으로 정했다. 이곳은 일제 강점기때 있던 고급 요릿집이다.
그러나 개성은 대한민국이 점령했던 지역이 아닌 북한군의 적진이었다. 첫 회담을 위한 장소 선정에서부터 신경전이 있었고 결국 개성에 위치한 음식점을 선택해서 첫 회의를 열었다. 그 때의 분위기는 양측 대표단은 만난 자리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1951년 7월 10일 첫 정전회담 장소는 유엔군의 제안으로 북한의 원산 앞바다 덴마크의 병원선 위에서 하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이에 북한은 덴마크배는 연합군 소속이라는 이유로 중공군은 거절했고 원래는 남한땅이였지만 현재 자신들이 점령하고 있는 개성해서 하자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를 유엔군이 받아들인 것이다. 유엔군은 개성 내봉장은 개성 시내를 관통하는 것은 아니였기에 회담 장소로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북한군의 치밀한 계략이 있었다.
백기를 단 것은 양측의 합의한 사항이었다. 개성에서의 회담을 수용한 유엔군은 개성시내를 관통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 합의를 한 것이다. 북한군 트럭 3대가 유엔군 대표단 행렬을 인도하면서 일부러 개성 시내를 천천히 돌아서 가도록 퍼레이드를 한 것이다. 이는 유엔군이 백기를 펄럭이며 개성시내를 행군하게 된 것이다. 이를 중국이 엄청나게 선전에 이용한 것이다. 지금도 북한의 많은 영화들이 이런것들을 편집해서 역사왜곡을 하고 있다.
정전 협정의 딜레마
이때만 해도 정전회담이 이렇게 오래걸릴 줄 몰랐다. 두 가지 쟁점에서 계속 부딪쳤던 것이다. 첫 번째 쟁점은 휴전선의 위치였다. 38도 선을 기준으로 나누기로 했는데 정전회담이 결렬되면 강원도를 뺏길 위험이 너무 컸기때문에 북위 38도 선이 아니라 군사 접촉지역을 기준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쟁 상황에 따라 군사분계선이 조금씩 바뀔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양측은 정전협정 체결 전까지 더 많은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전투가 더욱 치열해지는 계기가 된다.
붙어있는 남북에 경계선을 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땅을 더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지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었던 군사분계선 지역이었다.
또 하나의 쟁점은 포로교환 문제였다. 이 문제가 무려 1년 6개월이나 지속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희생자 감소 및 보호를 위해 1949년에 제네바 협약이 이루어졌다. 이 협약이 처음으로 적용된 전쟁이 바로 한국전쟁이다. 중공군이 잡은 미군 포로는 약 1만 명이였고 미군이 잡은 중공군 포로는 13만 명이었다. 그래서 유엔 연합군의 제안은 자유의사에 맡기자는 것이었다. 중국, 북한, 한국포로가 직접 국적을 선택하길 주장했던 것이다. 유엔 측의 자유송환과 달리 북한측은 무조건 자동송환이었다.
중국군 포로 대부분은 자유주의 국가인 대만행을 원했다. 그렇게 2년 동안 본회의만 159회였고 남북대표단 정전회담 이후 25개월간 총 765번의 회의를 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에 양쪽 대표단이 사인을 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11분이었고 양측 대표가 조인식에 머문 시간은 단 15분이었다.
정전협정문에 기재된 북한, 중국, 미국 대표들의 서명이 있으나 정작 교전 당사자인 대한민국은 없다. 이승만 대통령의 사인이 없는 이유는 2가지였다. 첫 번째는 작전 지휘권을 유엔군에 넘긴 한국이었기 때문에 사인의 주체는 작전 지휘권을 갖고 있는 유엔이었다.
그리고 당시 이승만 정부는 휴전협정에 반대를 하고 있었다. 미국이 조금만 도와주면 곧 통일을 이룰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7월 27일 오전 10시 양측 대표단은 정전협정에 사인한다.
정전협정 이후
그렇다면 정전협정 서명 직후 한반도 내 지옥같던 전쟁은 멈췄을까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전 10시에 정전협정에 서명을 했으나 전쟁은 계속되었다. 그 이유는 정전협정문에 서명한 시점부터 정전협정문에 효력이 발생하는 시간을 12시간 후부터라고 합의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전협정에 서명한 오전 10시부터 12시간 뒤부터 전투 행위를 금지한다고 사인했다. 나름 이유가 있었는데 정전협정 조인식현장에 오지 않은 김일성, 팽덕회, 마크 클라크가 사인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오후 1시에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가 먼저 사인을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만 사인하면 정전효력이 발생하는데 유리한 고지 하나라도 더 점령해야 했다며 김일성은 27일 22시까지 사인을 하지 않았다. 약속했던 22시까지 버틴 김일성이 사인하면서 정전협정이 발효가 된다. 3년 1개월 1129일 만에 6.25 전쟁은 중지된다.
이 정전협정은 유효기간이 없는 협정으로 지금도 기술적으로 전쟁 중이다. 2023년은 정전협정 70주년으로 역사상 가장 긴 휴전 중이다. 이 6.25 전쟁 비극 중에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목숨을 잃은 건 병사뿐만 아니라 아직 병사가 되기에 너무나 어린 학생들, 학도의용군이 있었다.
낙동강 방어선 구축의 버팀목이 된 학도병의 희생이 7000명이었다. 10대 청소년 약 3만명이 참전했고 훈련받지 않은 학생들이 목숨을 걸고 전투에 나섰던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중학교, 고등학생등 모두 어린아이들이었다. 아직까지도 12만에 가까운 전사자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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