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뒷 이야기
8월 15일
1945년 8월 15일 정오 12시 경성에서는 고종의 손자 이우 장례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우는 일본에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군으로 복무 중 갑자기 사망한다. 일본에 떨어진 핵폭탄으로 인해 1945년 8월 6일 이우는 출근중이던 핵폭탄에 피폭되어 사망했다.
광복 8일전이었다. 타국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조선의 왕자 이후에 장례식이 8월 15일 낮 12시 경성 운동장에서 치러질 예정이었다. 그런데 12시에 치러지기로 했던 장례식이 미뤄지고 정오에 중요한 방송을 한다고 발표한다. 그리고 그 내용은 일황이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 항복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8월 15일은 너무 조용했다. 방송은 당시 일본 왕실에서 사용할 법한 어려운 용어들이 많이 있었고 녹음의 질 자체가 너무 좋지 않아 일본에서도 해설 방송을 준비했을 정도였다. 해설자도 전쟁 졌다는 말을 직접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사람들은 해방이라는 인식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함석헌 독립운동가를 당시 해방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토록 바랬던 해방의 순간이 왔지만 당시 조선 사람들은 해방 사실 조차 몰랐다.
광복을 알린 날 조선총독부는 일본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일본 정부에서는 아무런 답도 오지 않았다. 비공식 루트를 통해 일본의 패전을 알게 된 조선총독부는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조선인들의 분노를 통제해줄 정신적 지주인 독립운동가, 여운형을 찾아갔다. 당시 유명했던 김구, 이승만등의 독립운동가는 국외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국내에서 조선인들의 신망을 받고 있었던 여운형을 찾아갔던 것이다.
이때 여운형이 조선총독부에 요구한 5가지 조건이 있다.
일본은 바로 조건을 수락했다. 엔도와의 회담을 마친 여운형은 1945년 8월 15일 종로구 계동 2층 양옥집에서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했다.
8월 16일 모습
그리고 다음날 일제의 잔인한 고문이 자행된 서대문 형무소 앞에서 억울하게 수감된 가족과 친구들을 만이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서대문에서 종로까지 꽉차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거리로 뛰쳐나와 목 놓아 만세를 불렀다. 비로소 8월 16일 광복을 실감하며 맘껏 기쁨을 누린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8월 16일이 광복의 기쁨으로 만세 행진이 온 나라로 퍼져갔다.
8월 17일
그리고 광복의 기쁨을 신문에도 실렸다. 그러나 일본군도 신문에 겅거망동을 하지말라고 기사를 내며 단호히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하겠다는 내용을 실었다. 그리고 8월 17일 일본군은 방송국을 접수하고 무장한 일본군은 경성 곳곳을 점령했고 종로일대에는 일본군의 기관총까지 설치가 된다.
당시 일본군에겐 전투 중지 명령이 내려진 상태였기 때문에 경찰처럼 치안 업무권을 보유하고 있던 당시 일본 헌병을 이용했다. 광복직후 2600여 명이었던 일제 헌병이 한달여만에 16,000 명까지 증원되었다.
우키시마호 침몰사건
그리고 1945년 8월 24일 오후 5시 20분 이 배에는 일본에 끌려가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이 타고 있었고 해방을 맞아 일본에서 한국으로 오고 있었던 것이다. 우키시마호는 조선인을 가득채운 채 8월 22일 부산을 향해 출발했었다. 그러나 이틀 뒤에 일본 연안에서 우키시마호는 폭발한 것이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승선 정원이 4천 명인 우키시마호에 최소 정원의 2배 이상이 타고 있었다고 한다.
우키시마호는 왜 폭발했나?
일본의 주장은 미국이 뿌려놓은 수중지뢰 기뢰때문이라고 발표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기뢰 때문이라면 폭발지점구멍은 선체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뚫려야 하는데 우키시마호에 난 구멍은 선체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뚫려있엇다. 일본 해군이 의도적으로 배를 폭파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으로 강제 동원됐던 조선인들이기 때문에 일본의 기밀이 외부로 유출을 우려해 우키시마호를 폭파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침몰 후 9년 만에 1954년 우키시마호를 인양했다. 이유는 1950년~1953년 전쟁으로 피폐해진 한국에 철을 팔기 위해 인양했던 것이다. 수장된 조선인들의 유골 수습이 아닌 고철 회수 목적으로 인양을 했던 것이다.
38선 분할
일본은 광복 직후 연합국에 조선의 통치권을 넘겨야 했던 상황이었고 1945년 8월 11일 광복 4일전 미국은 한국의 한반도의 절반인 38선을 경계로 소련과 미국이 분할 점렴하자고 소련에 제안한다. 당시 2차대전 이후 전세계는 공산 진영 소련과 자유 진영 미국으로 나눠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일본 오키나와에서 전쟁을 마무리하고 있을 무렵 소련은 이미 한반도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전체가 공산국가가 되는 것이 두려웠던 미국은 38선으로 분할하자는 제안을 했던 것이다.
이때 일본군은 미국에 조선인 중에는 공산주의 혹은 독립운동자가 있는데 이 기회에 치안을 어지럽히려고 계획하는 자가 있다고 조선의 공산주의자의 위협을 운운하며 조선이 소련의 편이 될 가능성이 큰것 처럼 미국에 정보를 준 것이다. 이에 미국은 일본의 행정기관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는 패전국 일본이 당분간 조선을 억압할 명분을 얻은 것이다. 일본과 미국의 묘한 신뢰가 형성되던 그때 인천에서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다.
일본 경찰의 발포
미군이 1945년 9월 8일 입성했는데 인천항에는 미군을 환영하기 위해 수많은 조선인들이 모여있었다. 그런데 일본경찰이 그 조선일을 향해 발포를 한 것이다. 더 충격적인 것은 미국이 이런 일본의 행동을 두둔한 것이다. 일본 경찰은 조선인의 대규모 시위를 효과적으로 막았다는 것이다. 조선인 2명은 사망했고 14명이 부상을 당했다. 일본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미군의 신뢰를 얻고 조선인을 억압했던 것이다.
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 제1 회의실에서는 일본의 항복 조인식이 열렸다. 미군의 조선 주둔을 공식화하는 자리였다. 항복 조인식 직후 일장기가 내려가고 그 위에 태극기가 아닌 미국의 성조기가 게양된다.
1945년 9월 8일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일본은 1945년 말까지 대부분 무사히 일본으로 일본인들은 무사히 돌아갔다. 패전국이 이렇게 무사히 돌아가는것은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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