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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벌거벗은 한국사

의순 공주 이야기 (족두리 무덤이란? ) 18회

경기도 의정부 천보산 자락에 위치한 한적한 주택가 뒤에 방치되어 있던 무덤이 있다. 이곳에는 시신이 아닌 족두리가 묻혀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무덤 아래 족두리가 묻혀있다고 믿었고 이 무덤을 족두리 무덤이라고 불렀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조선의 공주, 오랑캐의 아내가 된 의순공주이다.

 

의순공주 가묘
의순공주 가묘


청 나라 사신오다 
1649년 17대 조선의 왕 효종은 아버지 인종때 삼전도의 굴욕을 겪었던 병자호란때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서 긴 인진 생활을 했다. 효종이 즉위 후 청나라에서 사신이 비밀문서를 들고 온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13년이 지나고 청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왔는데 병자호란의 여파로 청구 요구에 복종해야 했던 조선이었다. 효종은 미리 사신을 보내어 청 사신을 만났는데 청 나라 사신은 이상한 것을 묻는다. 효종의 자식이 몇명이냐고 묻는 것이다.

 

효종 6명 공주
효종 6명 공주

 

청나라 여자를 요구하다. 

 

청 나라 칙서를 쓴 사람은 청의 최고 실세인 도르곤으로 당시 청나라 최고 실세로 섭정왕이라 불리고 있었던 인물이다.  당시 청 황제의 나이가 겨우 6세였기 때문이다. 순치제의 삼촌이 도르곤으로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리던 시대였다.  칙서의 내용은 현재 도루콘의 5번째 아내가 죽어 조선에서 신부감을 보내라는 요구였다. 즉 청나라와 사돈을 맺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조선의 명나라에 대한 인식은 명나라는 중화문명의 나라 청나라는 오랑캐의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효종에게는 6명의 공주가 있었다.  그나마 공주를 포함 왕실 및 대신의 딸 중에서도 신붓감 후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청나라 풍습에는 정복했던 나라의 군주의 딸을 비로 데려오는 풍습이 있었다.  그것이 천하를 다스린다는 상징적 의미였던 것이다. 

총 300여 명 중 자신의 딸을 내놓은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그러나 청 나라 사신의 계속된 요구에 이어지고 이에 관리들의 딸 4명 +종친들의 딸 16명을 모아 갔으나 30~40명을 모아 오라는 것이었다.  몇번의 설득 끝에 여인들을 확인하던 끝에 마음에 안든다며 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른 청의 사신이 다시 와서는 이전에 봤던 신부를 한번 더 보겠다고 하며 16세 여성을 도르곤의 신부로 뽑았다. 

 

 

의순공주

효종은 이때 뽑힌 신부를 16세 신부를 조선의 공주라고 소개한다. 이 여성은 이개윤 효종의 친척 금림군의 딸 이애숙이었다.  효종은 자신의 10촌 고모뻘 되는 이애숙을 양녀로 삼은 것이다. 효종이 이애숙에게 의순공주라는 작호를 내렸다.  의순공주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라를 위해 희생해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뽑힌 의순공주는 작호를 받고 한달 뒤에 조선을 떠나야 했다. 오랑캐의 신부감으로 떠나는 의순공주를 보는 백성들도 비참한 마음이었다.

 

의순 공주 뜻
의순 공주 뜻



이런 의순공주의 가족을 달래기 위해 효종은 의순공주의 아버지에게 종1품의 관직을 내리고 그녀의 두 오빠들에게도 포상과 함께 관직을 주었다.  한양에서 청나라까지는 2개월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고 청에 도착하자 도르곤이 직접 마중을 나와있었다

의순공주에게 백송골이라는 청나라식 이름을 지어주었다. 도르곤의 나이는 39살, 의순공주는 16세였다. 의순공주가 떠나고 4달 뒤 청나라에서 여자를 더 보내다는 사신이 왔다. 사실 효종은 청나라 몰래 북벌정책을 계획하고 있었고 이를 의심하던 도르곤은 여자를 요구하며 조선을 시험하고 있었다. 이때 조선은 남성 중심 사회였기 때문에 나라의 위기에 여성의 희생을 강요했던 것이다.

 

도르곤 사망 

결국 청나라로 갔던 여성들이 다시 돌아오는 일이 벌어졌다. 이유는 청나라 도르곤이 사냥을 나갔다가 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도르곤의 죽음으로 위기에 처한 의순공주였다. 게다가 도르곤은 섭정왕이였기 때문에 죽은 뒤에 그는 역적이 되어 그의 시체는 토막이 나기까지했던 것이다. 

 

의순공주 조선에 돌아오다. 
이에 의순공주는 재산으로 처분되어 청나라의 새로운 실세 보로에게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의순공주는 도르곤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리고 보로는 1년만에 사망하게 되고 그 후의 그녀의 삶은 주변으로부터 소외된 삶을 살았다. 그 후에 아버지 이개윤이 청나라 황제에게 딸을 돌려 달라고 말했고 황제는 흔쾌히 허락했다. 

 

의순공주 죽음
이에 의순공주는 조선으로 다시 돌아왔으나 사람들은 의순공주를 보고 침을 뱉고 욕하였다.. 또한 딸을 데리고 온 이개윤을 처벌해야 된다고 상소가 올라왔고 이에 나라와 조정에서 버림받고 내쳐진 이개윤은 조선 밖으로 내쳐졌다. 이렇게 의순공주는 조선에 온지 7년이 된 1662년 8월 6일 28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족두리 무덤이란? 


그리고 의순공주가 죽고 난 후 만들어진 것이 있다. 바로  족두리 무덤이다. 이 족두리 무덤은 사람들이 오랑캐와 사느니 강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를 만들어 냈고 그 강에서 족두리가 떠올랐고 그 족두리를 건져서 무덤을 만들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바라던 이상적인 모습에 맞춰서 의순공주를 기억하기 위해 의순공주의 거짓된 이야기를 전설로 만들었던 것이다.

 

족두리 무덤
족두리 무덤



결국 죽음을 미화시켜서 살아 돌아온 것은 죄라는 것이었다. 족두리가 묻힌 무덤은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을 수 밖에 없었던 조선이란 나라의 무능함과 치욕을 지우려 했던 흔적이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돌아왔을때 반응도 비슷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