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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History/벌거벗은 세계사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가 대제로 불리는 이유

표트르가 바다 진출을 위해 주목한 곳 흑해지역은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으로 해양 진출에 적격인 곳이었다. 하지만 흑해로 나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곳인 아조프해 이곳을 지키는 오스만제국과 싸워야했다.

 

 

1695년 오스만 제국과 결전을 벌이지만 첫번째 원정에 실패한다. 1696년 두번째 원정을 나서고 결국 아조프 요새를 차지한다.

 

 

서양문물 배우러간 표트르 대제

그러나 아직 오스만 제국을 정면으로 공격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1697년 200명이 넘는 사절단을 꾸려 서유럽으로 보낸 후 문물을 배워오게 했다.  표트르 대제는 근위대 장교로 신분을 속이고 사절단에 합류한다. 표트르 대제가 이렇게 한 이유는 기술 원조와 더불어 전쟁에서의 승리를 홍보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서유럽의 발전한 기술을 배우기 위해 사절단에 합류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변장은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유럽 남성의 평균 키는 약 160cm였으나 표트르 대제는 약 200cm 로 변장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표트르 대제의 악취미  

일정 중에 어느 해부학자가 모은 태아의 시신을 대량으로 사들여서 수집을 위한 방을 만들어 이것들을 수집한다.  

 


 표트르 대제는 15개월 동안 조선술을 배웠고 이를 뽑는 발치 기술도 배웠다. 해부학도 공부를 했다.

 

 

그러나 고국에서 황실부대의 쿠데타가 발생 일정을 중지하고 돌아가 쿠데타를 진압한다. 쿠데타의 주동자는 이복누나 소피야였고 이에 소피야의 창문밖에 쿠데타 수장의 목을 매달아 놓았다.  


표트르의 개혁  

 

전통의상 벌금 징수
다시 권력을 안정시킨 표트르는 본격적인 개혁을 시행한다. 전통적인 복장을 입던 귀족들에게 예복문화를 유럽식으로 바꿨다. 전통 의상을 입으면 벌금을 징수했다. 1705년 모든 귀족의 수염을 깍게 했다. 당시 정교회에서는 수염을 자르는 행위는 이단적인 행동이었다. 이렇게 개혁과 동시에 40여 가지에 달한 세금을 징수하게 하면서 국고를 채워나갔다.  

 평생 군복무
이 세금보다 더욱 반발이 심했던 개혁이 있었다. 그것은 죽을때까지 군복무를 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20만명을 웃도는 상비군을 확보하게 되었고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상비군을 갖추게 되지만 또한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한 정책이기도 했다.  


 


 

스웨덴과 전투
이제 표트르는 해양진출만 남았다.  이에 표트르 대제는 발트해와 연결되어 있는 스웨덴을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발트해는 북해와 대서양과 연결된 곳이자 아메리카 대륙까지도 교역을 할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스웨덴은 강국이었고 이에 표트르 대제는 스웨덴의 약 4배 규모인 4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스웨덴과 결전을 치렀으나 쉽지 않았다.

 

이에 4만 5천여 명의 농민을 징병하며 병력을 보강, 성당과 교회에 있는 종을 떼서 대포를 만들었고 1703년 최초의 함대 발트해 함대를 만들었다. 이것이 140여 척 규모의 함대로 성장했고 현재 러시아의 4개 함대 중 하나인 발트해 함대가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발트해 함대로 스웨덴군을 다시 공격, 최후의 결전 폴타바 전투에서 격돌 스웨덴군은 6900여 명의 사상자와 2800명의 포로가 붙잡히며 패배한다.  그렇게 표트르 대제는 발트해의 주인이 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
이후 이곳에 해양 강국의 입지를 다지고자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 이것이 유럽으로 향하는 창이라는 별명의 러시아 제 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뜻은 성 베드로에게 바치는 도시라는 의미였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 곳곳에 표트르 대제의 흔적이 많다 보니 표트르 대제와 연결지어 생각하게 된다.  또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건축양식이나 정원, 운하 도시 암스테르담의 양식에 깊은 인상을 받아 신수도 상트페데르부르크에 암스테르담의 양식을 반영하여 만들었다.  

 


황무지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역에 수만명의 농민, 포로를 투입해 건설한다.  그 후에 이곳으로 수도를 이전 귀족들에게 강제 이주 명령을 내렸고 해군 양성에 기점이 되도록 했다.  

 

 

황제에서 대제로
표트르 대제의 루스 차르국은 점점 더 거대해지고 카렐리아, 잉그리아 에스토니아 리보니아를 차지하며 유럽으로 가는 통로이자 발트해 길목의 중요한 거점을 얻게 된다. 그리고 1721년 나라이름을 루스 차르국에서 러시아 제국으로 바꾼다.  그리고 차르가 아닌 황제로 부를 것을 명령한다. 이후 표트르는 황제를 넘어선 위대한 황제를 뜻하는 대제로 불리게 된다.  

 

예카테리나 등장

그러나 러시아 제국 건설이후 표트르 대제의 권력은 오래가지 못한다.  질병을 앓고 있던 대제는 1725년 1월 28일 유언장도 남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다.  이후 37년 동안 황제가 6번이나 바뀌면서 혼란기를 맞게 되고 이때 혼란을 잠재운 강력한 황제 예카테리나 대제가 등장한다.  


 


 
항구 세바스토폴이 탄생
예카테리나 대제가 주목한 지역은 흑해 연안이었다.  1783년 흑해 함대를 창설하게 되고 폴타바 전함의 길이는 약 40m였다면 예카테리나의 영광은 약 49m로 업그레이드되면서 커지고 흑대함대는 지금의 크름반도를 점령하고 크름반도에 해군항을 건설하면서 장엄한 도시라는 뜻의 항구 세바스토폴이 탄생한다.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대제가 대제로 불리는 이유  

흑대 함대의 빠른 성장으로 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는 러시아 제국이었다. 예카테리나 말년에는 북아메리카 알래스카까지 진출했다. 이때 러시아 제국은 유럽, 북아메리카, 아시아 3 대륙에 영토를 가진 엄청난 제국이 된다.  

 표트르 대제의 발트해 함대는 강대국을 향한 발판을 마련했고 예카테리나 대제의 흑해 함대는 러시아를 강대국의 반열에 올려놨다. 이것이 두 인물이 대제로 불리는 이유이다.  

 (벌거벗은 세계사 6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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