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클랜드는 영국에서 13,000 km 떨어진 곳, 남극 근처에 위치한 나라로 19세기부터 영국이 포클랜드 제도를 지배하고 있었다.
1970년 말과 1980년대 영국은 경제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고 이에 국방비를 삭감하게 된다. 국방비의 예산 삭감으로 포클랜드 제도를 순찰하는 영국 순찰선이 철수하기 된다. 이에 아르헨티나 정부는 영국이 포클랜드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는 것이라 해석을 하고 이 사건을 아르헨티나의 어지러운 국내 상황을 타개할 방법으로 삼은 것이다.
포클랜드 제도
포클랜드 제도는 영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남극과 가까와 펭귄이 많이 사는 곳으로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곳이다.
아르헨티나 상황
당시 아르헨티나는 레오폴드 갈티에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상태로 1981년 12월에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후 언론 통제와 인권 탄압은 물론 반대파 정치 인사들을 암살하기까지 하는 무자비한 공포정치를 펼치고 있던 상황이었다.
아르헨티나의 선재공격
이에 대한 반발이 국내에서 심각해지고 있었다. 이에 그는 분노한 시민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전쟁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게 아르헨티나 정부는 1982년 4월 2일 약 2만 8천 명의 병력을 포클랜드로 보내 영국과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명백한 선제공격이었다.
영국의 참전과 승리
그러나 사실 아르헨티나는 영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영국에서 포클랜드 제도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또한 포클랜드는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땅을 가져봤자 경비 비용만 더 들어가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영국 내에서도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이에 마가릿 대처는 전쟁을 선택했고 항공모함 2척과 7척의 구축함을 포클랜드 제도로 보냈다. 이것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에서 최대 규모의 함대가 출동한 것이다. 또한 영국 시민들에게 영국의 건재한 국방력을 보여줘야한다며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이런 단호한 대응은 국민들을 단결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렇게 해전과 공중전이 약 두 달 정도 이어졌고 1982년 6월 14일 포클랜드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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