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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벌거벗은 한국사

팔만대장경을 만든 이유와 고려 몽골 침략 과정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진 시기는 1233~1248년으로 이 시기 몽골은 중국, 러시아, 유럽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나라였다. 이때 몽골의 지배자가 칭기즈칸(재위1206~1227)이었고 몽골 제국의 건국자이자 몽골 제국의 부흥기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12~13 세기 몽골 지배영역
12~13 세기 몽골 지배영역


팔만대장경을 만든 이유

 

몽골 침입때문이었다. 이때 부처의 힘으로 몽골을 물리치기 위해 만든 것이 팔만대장경이다. 합천 해인사 국보 팔만대장경은 경판의 수가 81258매에 달하여 팔만대장경이라 불린다. 1233~1248년 완성되는데 약 16년 걸렸다.  경판(약 3250m)을 하나씩 쌓아 올리면 백두산(약 2700m) 보다 높다.  

 

해인사 팔만대장경
해인사 팔만대장경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 중인 몽골이 고려를 침략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의문의 살인사건 때문이었다. 1225년 압록강 근처에서 몽골의 사신 저고여가 살해된다. 고려의 사신으로 왔다가 돌아가던 중 살해된 것이다. 이 사실에 분노한 몽골은 6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했다. 당시 몽골군을 보면 모든 나라가 두려워했지만 몽골군의 숫자는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부족한 몽골군 수을 많아 보이게 하기 위해 정복한 지역민들을 포로로 잡아서 몽골군처럼 위장을 지켰다.

 

몽골 사신 저고여 살해
몽골 사신 저고여 살해


여몽전쟁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 중 가장 길었던 전쟁으로 무려 30여년이나 걸렸다. 몽골사신이 죽은 6년뒤 1231년 8월 약 3만 병력으로 고려를 침략한다.  저고여 사건 당시 칭기즈칸은 서방 원정 중이었다. 그리고 원정 중 칭기즈칸이 사망하면서 새로운 칸이 즉위하고 여러 상황을 정리하고 전쟁을 시작한 시점이 1231년이었다. 

 

고려의 상황
당시 고려는 최씨 무신정권기로 무신들의 쿠데타로 100여 년간 권력을 잡은 무신 정권이었고 최씨 집안은 무려 60여년간 대를 이어 정권을 이어온 집안이었다.  당시 임금을 비롯한 왕실은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였고 모든 의사결정은 최씨집안이 하고 있었다. 이때 최씨 집안은 몽골이 쳐들어오는데 강력한 군사력을 지녔다고 자만하고 있었다.  

 

 

몽골의 침략 과정

 

몽골 1차 침입
이렇게 몽골군이 고려를 침략하고 있었고 1차~2차 몽골군의 총사령관은 활을 잘 쏘는 살리타였다. 몽골 살리타의 1차 침략 경로는 세 개의 부대로 두 갈래 경로로 침략한다.  그들의 목표는 고려의 수도 개경이었다. 

 

몽골 1차 침략 경로
몽골 1차 침략 경로



그러나 귀주성에서 몽골군은 발목이 잡힌다. 귀주성의 총지휘관 박서는 귀주성을 지키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했고 이렇게 4개월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 기간동안 지원군은 오지 않았다. 이때 이미 개경은 함락되었고 이에 전쟁에 이겼음에도 항복하라는 지시를 받게 되었다. 1232년 음력 1월 11일 고려의 항복을 받아내고 몽골군은 철수한다.

 

귀주성 위치
귀주성 위치
운제
운제는 성문을 열기 위해 사용되었던 기구로 몽골인은 이름 사용해 귀주성을 공격



 

강화 천도
최씨 무신정권은 항복 후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겠다고 선언한다.  전쟁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고 개경에서 수도를 유지하는 것은 전쟁의 방어가 어려울것으로 예상했으며 또한 몽골은 해상전에 약하기 때문에 강화도로 선택을 했던 것이다. 최씨 정권이 강화천도 이후 가장 먼저 한 것은 자신들의 궁궐을 짓는 것이었다. 몽골군이 쳐들어 오는 상황에서 백성들의 노동력으로 자신들의 안락을 위한 건물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몽골 2차 침략
몽골군은 떠났으나 강화도 천도 후 백성들의 불만은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강화천도 3개월 만, 1차 침략 후 약 8개월 만에 다시 몽골군은 고려를 침략한다. 


처인성 전투
지금의 용인지역이라 할수 있는 처인성을 지나는 중이던 몽골군은 김윤후(고려후기 승려이자 무신)  가 쏜 화살에 맞아 적장 살리타가 죽게 된 것이다. 갑자기 총사령관을 잃은 몽골군은 도망쳤고 당시 교통의 요지였던 처인성은 역마를 통한 교통 체계를 수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몽골이 처인성을 차지하면 순식간에 경상도까지 진격이 가능할 뿐아니라 어느방향으로도 공격이 가능했다.

 

처인성 위치
처인성 위치
처인성 위치와 모습
처인성 위치와 모습



처인성은 (향,부곡, 소:특수한 물품의 생산 및 업무를 위한 행정구역) 처인부곡으로 대부분 사회적 지위가 낮아 차별받고 살던 사람들이었다. 처인성 전투의 승리로 처인부곡은 처인현으로 승격되고 백성들의 지위도 향상되었다. 

몽골 3차 침략
살리타 적장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몽골은 3차 침입을 한다.  3차 침략으로 경상도 지역까지 장악하고 고려는 결국 항복하고 만다. 

4차 침략 
그러나 1248년 고려가 약속을 어겼다며 4차 침략을 감행하지만 몽골은 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돌연 후퇴한다. 

5차 침략
그리고  약 5년뒤 1253년 10월 고려가 또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1만의 병력으로 5차 침략을 감행한다. 그들의 요구는 고려왕이 몽골로 와서 항복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개경환도였다. (출육환도)


 


충주성 전투 
2차 여몽 전쟁의 공로로 무관 관직을 하사받은 김윤후가 지키고 있었고 이 전투는 70일 동안 계속된다.   장기간의 전투로 전쟁의 피로도에 빠져있던 상태에 김윤후는 노비와 백성을 불러 놓고 전쟁에서 이기면 노비에게도 관직을 주겠다며 노비문서를 불태운다. 이로 인해 백성들의 사기는 다시 살아나고 결국 몽골군은 다시한번 도망친다. 전쟁에서 이긴 이후 신분을 가리지 않고 공로에 따라 관직을 부여 받았다. 

5번째 침략으로 고려 전역을 짓밟았던 몽골이었고 전쟁에 지친 몽골은 고려와 협상에 나서면서 3가지 요구 조건을 내민다.

 

몽골의 요구 조건
몽골의 요구 조건



6차 침략 
그리고 다시 침략, 이때 몽골군의 포로가 된 고려 백성은 무려 20만명을 넘었고 몽골군이 지나간 길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1258년 고려는 최씨 무신정권의 지도자 최의가 부하들에게 살해된다.  12월 고려정부는 수도를 개경으로 옮길 것을 약속하고 전쟁을 끝낸다.

 

몽골의 침략 타임라인
몽골의 침략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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