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대적 관계의 쌍방이 극적으로 화해하거나 급격한 정책 전환을 뜻하는 관용어가 있는데 미국 닉슨 대통령은 뼈 속까지 반공주의자였다. 그런 사람이 중국을 방문했던 사건은 쇼크에 가까웠고 닉슨 인 차이나라는 오페라까지 만들어졌다.
미국이 대만과 수교 단절하기 전 상황
1972년 닉슨 대통령 방중
닉슨이 중국을 방문했던 해는 1972년이다. 이때 우리나라는 박정희 정부의 유신 선포가 있었다. 닉슨의 중국 방문이후 한국을 달래기 위해 닉스 정부는 미국 특사를 보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이 아시아의 공산화를 방치한다는 의심을 하게 되고 이에 자신이 대처해야 한다는 혼란한 국제정세 속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한 유신을 선포한다. 10월 유신 특별 선언문 초고에는 닉슨 방중으로 이런 조치를 한다는 문구가 있었을 정도였다. 이후 미국의 강력한 반발로 해당 문구는 삭제되었으나 닉슨의 중국 방문에 박정희 정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우리나라 만큼 북한도 충격이었는데 이에 북한도 2개월 뒤 12월에 헌법을 개정한다. 1948년 북한 최초 헌법인 건국헌법에서 1972년 12월 사회주의 헌법으로 통째로 바꾸고 주석을 만들어 김일성 1인 지배체제를 확립하게 된다. 미중 정상의 만남이 남.북한 내부의 권력 강화를 유도한 셈이다.
핑퐁 외교의 시작
일본 나고야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 1971년 3월 28일 ~4월 7일 일본이 세계 최강의 중국을 초청했고 누군가 대회 기간에 미중 선수단 상호교류를 제안했다. 그리고 1971년 4월 10일 미국 탁구 선수단이 베이징을 방문하게 된다. 이렇게 적대국이었던 미. 중 사이에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렇게 핑퐁외교로 미중 관계 개선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미중 관계 개선은 이미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서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꺼리를 찾던 중 마침 나고야 탁구대회가 좋은 계기가 되어 준 것이다. 탁구가 미중 관계 개선의 촉매제였던 건 사실이다.
미국이 중국과 수교한 이유
미국의 베트남 전쟁 고전
1954년 베트남 분단 후 내전이 발발 미국은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남베트남 정부를 지원한다. 곧 전쟁은 미국과 북베트남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세계 최강을 자처하던 미국은 북베트남과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전쟁의 장기화로 미군 피해가 증가하면서 미국내 반전 여론도 거세지는 상황이었다. 닉슨은 타개책이 필요했다.
- 항미원월- 중국이 부르는 베트남 전쟁, 미국에 대항에 베트남을 지원한다는 뜻.
68년 당시 미국 병력은 약 55만 명이 투입되었고 1965년 중국군도 후방지원부대 파견을 시작으로 1968년 약 32만 병력을 투입한다. 중국군의 이런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뜩이나 고전 중이던 미국에겐 악재였던 것이다.
중국과 소련사이의 틈
또 다른 이유는 냉전 시대 중심의 미국과 소련이었는데 미국은 중국을 통해 소련을 견제하기를 원했고 이때 중국과 소련 사이의 틈이 생긴 것을 포착했다. 사실 중국과 소련은 가장 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사이였고 19세기 중국의 영토를 가장 많이 가져간 나라가 러시아였다. 2차 아편전쟁 전후로 연해주 등 약 150만 km2를 러시아에 빼았겼던 중국이었고 이 과정에서 한반도가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1949년 중화민국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같은 공산국가 친소일변도였던 중국은 1950년부터 소련과 갈등이 시작된다. 이것도 한국과 관련이 있다. 한국 전쟁때 소련의 지원을 받아 참전한 중국이었으나 이것은 무료 지원이 아니였다. 전쟁이 끝나고 중국은 막대한 전쟁 지원금 빚을 갚아야했다. 이후에도 소련으로부터 고가의 무기를 구입했는데 소련은 제3세계에 팔았던 무기의 가격보다 중국에 더 비싸게 판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중국도 핵을 가지고 싶어 소련에 요청했으나 소련은 이를 거부하면서 소련과 중국 사이는 틀어졌던 것이다.
1969년 실제로 소련과 중국의 무력충돌이 있었다. 전바오다오 우수리강 중간에 있는 작은 섬 0.74km2 면적이 중소 국경선이 통과하는 지점이 있는데 홍수가 나면서 국경선이 희미해졌고 서로 약간의 신경전을 벌이다 결국은 장갑차, 대전차포가 등장하는 무력충돌로 이어졌다.
중국과 대만이 양국이 아닌 양안 관계가 된 이유
중국은 대만을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고 미국이 모호한 태도와 미국의 중국과의 화해 시도에 대만은 크게 분노한다. 이에 대만은 UN을 탈퇴하고 이후 중국이 UN의 상임이사국이 된다. UN을 탈퇴하면서 대만은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비정상국가로 전락했고 외교적으로도 고립이되었다. 한편으로는 이 일을 계기로 대만사람들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대만 민족주의 성장의 계기가 되었다.
미국 중국과 수교 전제 조건
1979년 미국은 중국과 수교를 시작했고 수교의 전제 조건은 1954년 미국-대만의 상호방위조약을 폐기 및 대만에서 미군이 철수, 대만과의 수교를 끊는 것이었다. 미국은 이를 받아들이고 중국과 1979년 수교를 시작하면서 대만과는 단교를 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대만의 상태를 유지하게 된 것이다.
미국의 이중 정책
이렇게 대만을 버렸던 미국인데 미국내 권력 서열 3위 미하원의장 낸시 펠로시 2022년 8월 대만을 방문했다. 펠로시 의장은 도착 즉시 중국과의 대립으로 타이완의 민주주의가 위협받는다며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대만관계법 제정
방중을 했던 대통령은 닉슨 대통령이었으나 중국과의 수교 당사자는 카터 대통령이었다. 카터 정부는 의회와 충분한 조율 없이 중국과 수교를 맺게 되었고 이에 입법부의 강한 반발로 미 의회 주도 <대만관계법>을 제정한 것이다. 대만 관계법의 골자 내용은 중국이 대만 문제를 비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용납하지 않고, 대만에게 방어용 무기를 제공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사실상 대만의 독립적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중국이 주장하는 하나의 중국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었다.
미중 수교를 진행하면서 중국은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중국의 개혁, 개방이 시작되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으로 수출이 시작되면서 중국이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게 되면서 냉전은 약해지고 새로운 시대로 전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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