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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인천상륙작전 속 월미도에서는 무슨일이? (팔미도, 월미도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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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의 터닝 포인트 인천 상륙작전은 작전 자체가 위험한 작전이었다. 보급이 어려운 작전에서 적진의 한복판으로 돌격하여 수만 명의 군인이 생존해야 하는 것이다. 모두가 반대했던 위험천만한 작전이었고 성공했기 때문에 20세기 역사상 최고의 군사 작전이라 불리며 열세에 있었던 6.25 전쟁의 판을 단숨에 뒤집은 작전이다.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7월 한달만에 영토의 대부분을 침략당한 남한이다. 최후의 방어선 낙동강 전선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고 UN 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전세를 역전시킬 새로운 계획을 준비했다. 

 

 

2단계로 진행된 인천상륙작전 

수도인 서울을 빨리 탈환하려면 인천으로 상륙해야 한다. 그래서 미 해병대와 한국군 75,000명의 병력이 인천으로 모여들었다. 문제는 극심한 조수 간만의 차로 해안가에 바닷물이 차 있어야만 배를 끌고 들어올 수 있는데 그래서 만조부터 물이 빠지는 짧은 기간동안에 모든 병력이 해안가에 착륙해야 했다. 만조 시기를 놓치면 모든 배가 갯벌에 갇혀버린다. 짧은 만조에 내렸다해도 바로 적진에 둘어싸이는 상황이었다.   

 

 

인천상륙작전 1단계 

 

팔미도 작전 (켈로 부대 )

이제 인천에 상륙작전을 감행할 시간은 밤으로 정해지고 밤 시간대에 보이지 않는 작은 섬들과 암초가 문제였다. 그래서 기준점과 이들에게 길을 밝혀줄 등대가 필요했다. 그래서 팔미도 등대가 무의도와 영흥도 대문같은 섬 가운데 있었고 팔미도 등대를 상륙작전의 나침반처럼 사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팔미도는 이미 북한군이 점령한 상태였다. 이에 맥아더는 다시한번 켈로 부대를 팔미도 등대 탈환 작전에 투입시켰다. 9월 15일 0시 40분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히라는 명령이었다. 켈로 부대원을 포함 6명의 한.미 특공대가 팔미도로 진입하게 되고 북한군을 사살하고 팔미도 등대를 장악한다. 그것이 9월 14일 23시 30분이었다. 맥아더 장군의 지시대로 1시간 뒤에 불을 밝혀야 됐는데 등대를 밝혀야 하는데 발전기와 등대를 연결하는 점등장치에 나사가 빠져있었다.

 

 

연합군은 이미 인천 앞바다에 대기 중이었으나 약속 시간은 이미 지났다. 켈로부대원들은 이에 절망하고 켈로부대원은 땅바닦에 주저앉게 되는데 바닦의 나사못을 짚게 된다. 그렇게 극적으로 새벽 2시 20분에 팔미도 등대가 켜진다. 그리고 월미도에 대규모 폭격이 시작된다. 261척의 함선에서 사격이 시작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은 두 단계로 이루어졌다. 월미도 상륙작전의 시작은 팔미도에 상륙해 등대를 켜는 것이 작전의 시작이다. 일부 병력이 오전 6시경 팔미도 등대에 진입해 월미도로 가는 길을 성공적으로 열어준다. 

 

월미도 상륙작전 

월미도는 인천항을 내려다볼수 있는 장소였고 또한 인천항 앞에는 월미도에 북한군이 주둔해 있었는데 월미도를 두고 인천항으로 진입한다면 역공을 당할수 있었기 때문에 월미도를 반드시 점령을 해야했다. 그래서 월미도를 포함한 주요 상륙지점의 이름을 빛을 삼원색을 따서 녹색, 빨간색, 파란색 3지점을 상륙하는 것이었다. 

 

적색, 녹색, 청색 해안 지점

월미도 상륙작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월미도 점령한 병력이 12시간을 버티는 것이었다. 갯벌에 물이 빠졌기 때문에 그냥 해안가에 버터야 하는 것이다.  녹색 해안 월미도에서 12시간을 버티면 적색, 청색 해안이 만조로 해안 진입이 가능했다. 북한군 제압을 위해 4시간가량 대규모 포격을 가했고 말 그대로 월미도는 초토화된다. 6시 33분에 포격이 멈추고 오전 8시경에 미 제1해병사단 대원 150여명이 월미도에 상륙했다. 오전 8시경 완벽하게 월미도를 장악하게 된다. 

 

 

이 작전 개시만 하면 무조건 성공할수 밖에 없는 작전이었다. 미군이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에게 퍼부은 포탄의 양은 약 50만톤이었는데 6.25 전쟁 3년동안 폭탄 약 63만 톤을 투하했다. 그 중의 상당수가 인천에 퍼부은 것이다. 팔미도 등대 탈환까지 시간이 너무 지체가 되어서 예정보다 늦게 월미도에 상륙한 것이다. 이미 해수면이 가장 낮은 간조시간이었다. 아직 연합군의 본진은 상륙 전이었다. 다음 밀물까지는 9시간 남은 상황이었다.  

 

 

인천상륙작전 2단계 

그날 오후 2차 상륙(적색, 청색 해안)을 시도한다. 두 번째 만조가 찾아온 오후 5시 32분이었다. 전력을 총동원하여 2차 목적지인 적색, 청색 해안에 상륙한다. 수많은 전투기와 항공모함 4척이 대동되었고 약 261척의 전함들까지 투입되어 어마어마한 폭격을 시작했고 엄청난 포격으로 인해 전의가 상실된 북한군이었다. 

 

 

인천을 무사히 상륙했고 2단계의 상륙 작전 성공으로 인천 시가지를 탈환한다. 아군의 피해는 전사 21명 실종 1명 부상이 174명이었고  약 2주 뒤 1950.9월 28일 서울 수복에도 성공하게 된다. 

 

1950년 9월 15일 상륙지점 표식

 

9.28 서울수복 

인천상륙작전 직후, 1950년 6월 28일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수도 서울을 한국군과 유엔군이 탈환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은 성공을 거두고 국군과 연합군은 38선을 10월 1일 통과하며 북진을 한다. 이 날을 기념해 국군의 날을 제정했다. 함경도 쪽으로 미 해병 제 1사단이 올라갔다. 

미 해병 제 1사단은 2차 세계대전에 최강의 전투력을 보여주었던 부대로 자강도 안에 숨어 있는 김일성을 찾으러 제 1해병단이 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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