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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장진호 전투 : 20세기 최초 미국과 중국의 격돌 (11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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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 미국 소련의 최초의 제트 전투기전 114 -3

6.25 전쟁 발발 후 1950년 7월 1일 한국에 주일미군을 급파했고 7월 8일 영국, 호주, 튀르키예 등에서 유엔군이 합류하게 된다. 6.25 전쟁 때 유엔 깃발을 꽂고 들어온 국가는 16개 국가고 1953년까지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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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최초 미국과 중국의 격돌 장진호 전투는 함경남도 장진강을 댐으로 막아 생긴 인공호수 장진호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11월 26~12월 13일까지 17일간 벌어진 전쟁이다. 

 

1950년 미 해병 1사단은 장진호 근처에서 중국군 12개 사단에 포위당하게 된다. 문제는 중국군은 약 12만 명에 달했고 미군은 3만 명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은 미군 지휘부가 대규모 중국군이 한반도에 와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해 생긴 일이었다. 미군은 중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를 간과했던 것이다. 1차적으로 투입된 중국군의 규모는 20만 명 이상이었는데 미군은 중국군 규모를 16,500명으로 파악을 했고 한마디로 중국군에 대한 분석이나 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게 미국에 중국군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장진호는 어떤 곳? 

그러나 끊임없이 나타나는 중국군과 더불어 미군은 극한의 추위와 맞서 싸워야 했다. 장진호 일대는 해발 2000m 정도의 개마고원 고산지대였기 때문에 낮에는 영하 29도 밤에는 영하  30도의 추위가 닦쳤다. 이런 극한의 추위는 전술에 치명적인 타격을 줬다. 전차, 탱크, 트럭 등 각종 장비의 윤활유가 얼어 발이 묶이고 땅이 얼어서 참호도 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가장 심각했던 것은 고통스러운 추위로 인한 병사들의 동상과 심지어는 얼어 죽기까지 했다. 이것은 보급이 열악했던 중국군도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두 나라 군대는 교전보다 혹독한 추위때문에 사상자가 훨씬 더 많이 발생하는 상황이었다. 이곳의 추위는 숨쉬기 조차 힘들만큼 고통스러운 곳이었다.

 

 

흥남철수 작전

이렇게 영하 30도의 추위속에 치열하게 버틴 미해병대는 12월 4일이 되자 사단 사병이 있는 장진호 남쪽 끝의 중국군의 포위를 뚫고 하갈 우리에 집결한다. 그리고 하갈우리에서 흥남항까지 철수할 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미해병대가 걸어서 110km를 걸어서 흥남항까지 철수하는 흥남철수작전이 시작된다. 

 

 

곳곳에 잠복한  중국군의 포위를 뚫기 위해 지속적인 전투기 엄호와 지상군의 포격이 계속되었고 치열한 사투 끝에  미해병은 12월 11일 함흥에 도착한다. 그리고 이때 피란민 98100여 명도 함께 함흥에 도착했다. 

 

 

흥남철수작전은 무사히 끝이 났지만 장진호 전투로 인해 미국과 중국의 막대한 피해가 있었다.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미군 사상자는 약 17,000여 명, 중국군도 약 48,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휴전 협정까지

이후 전쟁의 양상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승패를 가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처음부터 확전을 경계하던 미국,소련, 중국 지도부의 의지로 반영한 체 1951년 3월 말 38선 부근에서 교착되어 버린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1951년 5월 38선을 확보하면서 휴전 협상을 체결하고 6.25 전쟁에서 철수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공산진영 측도 지속적인 인명 및 경제적 피해로 1951년 6월 23일 정전 협정을 소련 대표 야코프 말리크가 제안하고 미국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회담이 시작된다.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본격적인 휴전 협정이 시작된다. 그러나 군사분계선 설정과 포로교환 방식으로 대립하면서 휴전회담은 지속적인 답보상태가 된다. 

 

 

게다가 이때 스탈린은 6.25 전쟁이 빨리 끝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미국이 한국 문제에 잡혀 있는 것이 공산주의 세력에 이득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회담이 지연되고 결렬될 때마다 38선 부근의 주요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고지 쟁탈전이 계속되면서 수많은 인명피해가 나타나게 된다. 2년 여간의 회담 기간 동안 양측에 약 300만 명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2년에 걸쳐 159회의 본회담과 765회의 각종회담이 개최된 후에야 마무리되었다. 

 

 

 

정전회담이 갑자기 진행된 이유

 답보상태를 유지하던 정전회담은 미국과 소련의 지도자가 바뀌면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1952년 말에 미국에서는 트루먼 정부가 막을 내렸고 6.25 전쟁 종전을 공약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 바로 아이젠하워였다.  그다음 해 1953년 3월에는 소련의 스탈린까지 뇌출혈로 사망하게 된다. 

 

 

전쟁을 주도했던 당사자들이 사라져 버렸고 이것으로 6.25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공산 측 대표, 유엔 측 대표가 정전 협정서에 서명하면서 3년 1개월 2일 만에 6.25 전쟁은 휴전에 들어갔다. 

 

 

그래서 최종적인 군사분계선은 서해안의 임진각 하구에서 강원도 고성에 이르는 248km로 설정이 되었고 군사분계선으로부터 남쪽과 북쪽 2km 후퇴한 지점에 비무장 지대가 형성되었다. 

 

 

6.25로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얻은 것은? 

하지만 크게 보면 전쟁 전 38선과 큰 차이가 없는 이것이 바로 6.25 전쟁의 결말이다. 6.25 전쟁으로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무엇을 얻었는가? 먼저 아시아의 골칫거리를 만들어서 미국의 힘을 분산하려고 했던 스탈린의 의도는 오히려 6.25 전쟁으로 인해서 전 세계의 냉전을 본격화시키고 미국과 소련의 극한 대치를 부르는 역효과를 낳았다. 그리고 마오쩌둥은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제한하는 이득을 보기는 했으나 6.25 전쟁으로 개혁, 개방에 나서는 기회를 30년 동안 잃게 된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6.25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념 갈등으로 분단되어 있는 유일한 국가이다. 6.25 전쟁을 국제적 시각에서 다시 보는 의미 있는 시간이다. 

 

 

 

마오쩌둥과 스탈린이 6.25전쟁에 개입한 이유 (114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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