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은 서울을 흐르는 작은 하천이지만, 조선 시대부터 현대까지 서울의 역사와 함께해 온 중요한 수로이다. 청계천의 역사는 조선 태종 때 시작되었으며, 당시에는 '개천'이라고 불렸다. 이후 청개천을 거쳐 지금의 청계천이 되었다.
태종의 개천 정비 사업
청계천의 유래는 (개천->청개천->청계천)으로 이어진다. 조선 태종(1411년)은 한양의 물길을 정비하기 위해 개천 공사를 시작했다. 한양은 북악산, 인왕산, 낙산, 남산에서 내려온 물이 자연스럽게 모여 흐르는 구조였으나, 남산에 막혀 배수가 원활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홍수가 자주 발생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인공 수로를 만들었다. 공사는 새벽 4시부터 밤 10시까지만 진행되었으며, 백성들의 과중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야간 공사는 금지되었다. 또한, 부상자가 발생할 것을 대비해 공사장 옆에는 응급 치료소도 마련되었다.
광통교 다리 건설 (조선 초기)
청계천을 가로지르는 다리 중 하나인 광통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처음에는 청계천 다리를 흙으로 만들었으나, 잦은 홍수로 쉽게 유실되었다. 이에 태종은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에서 가져온 병풍석을 사용하여 광통교를 만들었다.
오늘날 광통교는 청계천 복원 사업을 통해 보존되었으며, 역사적 가치를 지닌 유적이 되었다.
왕비의 병풍석으로 다리를 만든 이유 (신덕왕후와 태종에게 무슨 일이? )
신덕왕후 강씨 조선의 첫번째 왕비의 무덤(정릉)에 무슨 일이?
조선시대에는 27명의 왕이 있었고 추존된 왕까지 합하면 총 32명에 후궁을 제외하고 45명 정도의 왕비가 있었다. 조선의 첫번째 왕비가 바로 신덕왕후 강씨이다. 고려시대에는 고향에 둔 부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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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청계천 준설 사업
그 후 정비된 개천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오물이 생기고 늘어난 사람 수만큼 개천의 수질도 나빠지기 시작하고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모여 집을 짓기 위해 벌목을 하여 나무 숫자가 줄어들자 장마 때마다 홍수가 반복됐면서 토사가 쌓여 개천 바닥이 높아지고 비가 오면 개천이 범람하면서 이렇게 매년 악 순환이 반복되어 전염병, 인명 피해의 원인이 된 개천으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영조는 개천을 맑게 만들자고 한 것이 청개천이다.
영조는 자신의 업적 중 하나로 탕평책과 함께 청계천 준설을 꼽았다. 당시 한양의 인구는 30만 명에 달했으며, 식수는 깨끗한 지하수를 이용했지만 하수도 시설이 없어 생활 오수와 오물이 개천으로 흘러들었다. 이로 인해 청계천은 거대한 하수구 역할을 했으며, 특히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하면서 민둥산이 늘어나고 비가 올 때마다 토사가 청계천에 쌓이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러한 환경 문제로 인해 청계천이 범람하면 오염된 물이 우물로 스며들었고, 전염병이 자주 발생하게 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영조는 약 20만 명을 동원하여 석축을 쌓고 준설 작업을 진행했다. 이로 인해 홍수와 전염병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 한양의 인구 증가 및 상업 활성화에도 기여했다.
영조의 ‘경진지평’과 홍수 조절
영조는 청계천을 더욱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수표교 다리 아래 ‘경진지평(庚辰地平)’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이 글자의 ‘평(平)’ 자가 흙에 묻히면 토사를 파내야 할 시점이라는 기준이 되었다. 이는 홍수 조절 및 수량 측정을 위한 혁신적인 방법으로, 조선 시대의 치수 능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청계천과 로마의 애퀴덕트 비교
한양의 청계천이 한양 시민들의 생활을 지탱했던 것처럼, 로마 시대에도 100만 명이 넘는 인구를 유지하기 위해 아퀴덕트(Aqueduct)라는 대형 수로가 건설되었다. 애퀴덕트는 거대한 아치형 수로 구조로 로마 시민들에게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이는 조선의 청계천과 마찬가지로 치수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아피아가도, 아퀴덕트가 로마 제국에 미친 영향은?
유럽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이탈리아는 세계에서 풍부한 문화유산을 가진 나라 중에 하나이다. 특히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는 유럽의 고대문화와 서양 역사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우리나라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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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은 단순한 하천이 아니라, 조선 시대부터 현대까지 서울의 발전과 함께한 역사의 산증인이다. 태종의 개천 정비, 영조의 청계천 준설, 그리고 현대의 복원 사업까지, 시대에 따라 역할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서울 시민들에게 중요한 공간으로 남아 있다. 앞으로도 청계천이 역사와 문화를 담은 공간으로 지속되길 기대해 본다.
청계천 복개 사업의 문제점은?
1950년 청계천을 덮는 복개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서울 개발의 상징이었던 청계고가도로를 1977년에 건설한다. 그러나 30년 뒤 구조적 안전문제로 청계고가도로 철거를 결정한다. 이때 고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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