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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신정왕후 ( 조대비 ): 고종을 왕으로 만든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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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조선의 격동기, 왕실의 중심에서 정치와 권력을 조율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단순한 왕비가 아닌, 조선의 마지막 대왕대비로서 조선의 흥망을 지켜본 인물이었다. 바로 신정왕후 조씨이다. 그녀의 삶은 조선 후기의 정치, 문화, 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 신정왕후의 생애와 정치적 역할

신정왕후(神貞王后)는 1808년 12월 6일에 태어나 1890년 4월 17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조선 제23대 왕 순조의 장남인 효명세자(孝明世子)의 빈으로 간택되어 1819년에 세자빈이 되었다. 1827년에는 아들 헌종(憲宗)을 낳았다. 그러나 1830년, 남편 효명세자가 22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그녀는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 이후 1834년, 아들 헌종이 즉위하면서 그녀는 왕대비가 되었고, 1857년에는 대왕대비가 되었다.

 

신정왕후(=조대비)

효명세자의 부인이자 헌종의 어머니이며 순원왕후의 며느리, 풍양 조 씨의 대표인물 신정왕후(=조대비)가 살아 있었으며 헌종의 계비 효정왕후도 살아 있었다. 

 

 

철인왕후 드라마 속 조대비 신정왕후

 

조대비로 나오는 신정왕후가 순원왕후와 대립각으로 가끔 선왕(=헌종) 얘기를 하는데 순원왕후는 철종 이전의 헌종 (조선에서 가장 어린 나이에 왕이 됨) 때도 대리청정을 했다. 원래 헌종의 어머니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해야 하는데 시어머니(=순원왕후)가 살아있어 권력은 안동 김 씨로 유지되고 있던 구조이다. 

 

그러나 조대비로 결국 권력은 이동한다. 신정왕후는 조선 왕조 왕비 중 83세까지 제일 장수한 왕비이다. 또한 시어머니 순원왕후가 죽고 대왕대비가 되면서 흥선대원군의 아들 고종(=명복)을 왕으로 지목한 사람이기도 하다. 

 

‼️고종은 어떻게 왕이 되었나? [자세히보기] 👇

 

 

흥선대원군은 어떻게 고종을 왕위에 올릴 수 있었을까? (흥선 대원군 업적)

[선녀들 리턴즈 55회 중] 주제: 흥선군 이하응 흥선대원군 되다. 흥선군 이하응 흥선대원군은 원래 왕가와는 먼 친척 관계였다. 정조의 배 다른 동생이 있었는데 후사가 없었다. 그래서 왕족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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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신정왕후는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왕위 계승자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그녀는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인 명복(훗날 고종)을 익종의 양자로 삼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고종이 즉위할 당시 12세였기 때문에 신정왕후는 수렴청정을 통해 정국을 운영하였다. 이 시기 그녀는 경복궁 중건을 추진하고, 안동 김씨 중심의 정치 세력을 개편하는 등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 문화적 기여와 유산

신정왕후는 경복궁 중건을 추진하여 조선 왕실의 위상을 회복하려 하였다. 또한 종친부(宗親府) 관제 개혁을 통해 종친들에게 실직을 부여하고 정치 세력의 재편을 시도하였다. 그녀의 이러한 노력은 조선 후기의 정치 구조와 문화적 유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99년, 익종이 문조익황제로 추존되면서 신정왕후도 신정익황후로 추존되었다. 그녀의 시호는 무려 56자로, 조선의 왕비 중 가장 긴 시호를 가지고 있다. 그녀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의 수릉(綏陵)으로, 남편 익종과 합장되어 있다.

 

😄 흥미로운 이야기: 고구마와의 인연

신정왕후의 증조부는 조엄(趙曮)으로, 그는 고구마를 조선에 들여온 인물로 알려져 있다. 조엄은 1763년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고구마를 가져와 조선에 보급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의 식량 사정이 개선되었고, 고구마는 오늘날까지도 사랑받는 식품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신정왕후는 조선의 정치뿐만 아니라 식문화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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