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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문화예술

시인 백석 이야기

백석은 후대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시인중 한 명으로 윤동주 시인이 가장 좋아했던 시인이고 당대 최고의 모던보이였고 민족주의적이고 향토적인 모더니즘 문학의 대명사였다. 백석의 키는 190cm 정도 되었다. 백석이 광화문 거리에 나타나면 파리의 몽파르나스 거리 같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백석 유년시절 

백석의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우리나라 근대문학 초기엔 평안북도 문인들이 대부분이었다. 남강 이승훈 선생이 오산학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민족교육의 산실과도 같은 곳으로 3.1 운동 때는 학생과 교사가 단체로 참여할 정도였다 백석 선생의 6년 선배가 김소월 시인이다. 보통 당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부분 일본으로 유학을 많이갔다. 이유는 조선에는 대학이 없었기 때문이다. 

 

백석은 부유한 가정이 아니여서 유학을 포기하고 문학작품을 하나 쓴다. 그것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조선일보 부사장의 후원을 받고 일본 유학을 가게 된다. 이덕분에 일본에서 각종 외국어 학습을 받고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문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1988년까지 백석은 그렇게 알려진 편이 아니였다. 광복 후에 자신의 고향 북한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월북작가로 분류되어 그의 작품은 금기시되었다. 1988년 이후 다양한 문인들의 작품을 출판할 수 있게 된 후 비로소 조명받기 시작한 백석이다. 

 

백석의 시 

백석의 사슴이라는 시집을 내놓았으나 정말 구하기 어려웠다. 이 <사슴>이라는 시집은 출판 기념회 방문자에게만 100권 한정판으로 판매되었다. 다른 시집에 비해 두배 이상 비쌌다. 요즘 백석의 <사슴> 시집을 경매에 붙였는데 무려 7000만 원에 낙찰되었다. 

 

백석 사슴 시집 초판본
주요한 선생에게 드림.. 을해년에 백석이 삼가드렸다.

 

윤동주 시인은 백석의 <사슴> 시집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고 한 도서관에서 초판본을 발견하고 바로 필사한 후 동생에게도 시집을 추천할 만큼 이 시집을 사랑했다. 

 

윤동주가 필사한 사슴 ..

 

<여승>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낯이 넷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설어워젔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 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여우난골족 :  여우난골 동네 가족-  친척들이 모두 모인 명절날의 풍경을 담은 시
시골 정취가 느껴지는 향토적 분위기를 담았다.

 

백석 시 특징 

백석 시의 특징은 후각까지 자극하는 감각적인 어휘구사를 많이 했고 시에서 향토 음식들이 많이 등장해서 우리말의 보고 라 불리기도 한다. 토속적이고 향토적인 것에 관심이 많아 시에 집의 구조, 동. 식물명, 음식 관련 시어를 무려 3366개의 다채로운 시어를 사용했다. 

 

백석의 시는 토속적인 걸 가장 근대적으로 담은 모더니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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