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7월 17일 스페인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다. 스페인 군부의 핵심적인 인물 반란 우파의 지도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등장한다. 24 살의 젊은 나이에 육군 최연소 대위가 되고 식민지였던 모로코 북부 지역의 독립운동을 진압하는데 큰 전공을 세우며 그러다가 쿠데타가 일어나 우파, 즉 다른 지역의 핵심인물로 합류하게 된 것이다. 그는 잔인하고 비정한 성격으로 스페인 내전을 비극으로 이끄는 하나의 원인이 된다.
반란 지역의 목표는 스페인 군대를 동원해서 빠르게 주요 도시를 장악하고 정권을 탈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성공시키려면 반란 지역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1번째 과제가 있었다. 그건 바로 모로코에 있던 자신의 주력 부대를 반란을 위해 스페인 본토로 옮겨오는 것이었다.
히틀러 지원
이때 아돌프 히틀러의 도움으로 수송기를 통해 군대를 옮기게 되고 그것은 세계 최초로 스페인에서 대규모 항공 수송 작전을 성공시킨 것이었다. 또한 히틀러는 독일에서 최초로 대량생산한 하인켈 51을 비롯한 전투기 730 대와 1만 6천 명의 병력도 스페인에 지원했던 히틀러였다.
히틀러가 이를 도와준 이유는 독일은 제1 차 세계대전 패배 이후 모든 무장을 해제당한 상태였다. 군수공장을 폐쇄해야 했고 탱크, 군용기등 무기 감축등 강력한 제재를 받게 되었다. 이에 히틀러는 전쟁 준비를 위해 비밀 연구소를 만들고 극비리에 신무기를 몰래 만들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의 눈치를 보며 몰래 만들다 보니 신무기의 결함을 확인하기 어려웠고 이에 히틀러는 무기를 실험할 장소로 스페인을 선택했던 것이다.
히틀러는 군사지원을 빌미로 스페인 광산개발 권리를 가졌다. 이때 히틀러가 개발했던 핵무기는 실패했고 미국이 먼저 맨해튼 프로젝트로 성공한다.
무솔리니 합류
프랑코는 무솔리니의 파시즘을 지지하는 인물이었고 즉 히틀러와 무솔리니 프랑코는 사상적으로 같은 편이었다. 무솔리니는 스페인의 지브롤터 해협이 차후 전쟁을 할 때 물자수송에. 유리하다고 생각을 했고 이에 군사원조를 한다. 무려 7만 5천여 명의 병사를 대규모로 파견한다. 또한 무기도 엄청난 양을 지원했다. 이렇게 프랑코 장군의 지원 요청으로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참여하며 스페인이 제2차 세계대전의 최종 리허설 장소가 되었던 것이다.
스페인 내전 전개 양상
반란 진영은 스페인의 도시를 점령하기 시작했고 스페인 내전이 시작된 지 불과 2개월 만에 스페인 지역의 절반을 차치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스페인 내전은 예상 밖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대학살
반란 진영이 장악하는 곳에서 대대적인 학살이 벌어졌던 것이다. 학살의 대상은 공화진영과 노동자 조직 그리고 민간인까지 학살의 대상이었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약탈하고 여성들을 강간한 뒤 살해하기도 했다. 내전이 시작된 해인 1936년 세비야에서는 약 8천 명이 목숨을 잃었고 바다호스 지역에서는 1만 2천여 명이 학살당했는데 그중 1200여 명은 투우장에 갇혀 떼죽음을 당했다. 이렇게 전쟁기간 동안 반란 진영이 학살한 인원은 약 13만 명으로 추산된다.
의용군 조직
당시 스페인 공화국 정부는 스페인 내전 초기부터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노동자 조직이 맞서 싸웠다. 전국 노동조합과 노동자총동맹을 중심으로 약 400만 명의 조합원이 모였고 이들은 곧 전국곳곳에서 의용군을 조직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스페인 내전에 대한 불간섭 위원회를 조직하며 내전에 개입하지 않았다. 이것은 제1 차 세계대전의 트라우마로 많은 나라가 개입할수록 2번째 세계대전이 벌어질 수 있다고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 내전에 참가했던 예술인들
스탈린의 개입
세계각국의 사람들이 자발적 국제여단의 참여와 함께 공화진영에 강력한 후원자 스탈린이 개입한다. 당시 스탈린은 유럽에서 히틀러_무솔리니와 대립하는 관계였다. 프랑코의 승리로 스페인이 파시즘 국가가 된다면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이 뭉쳐 소련을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관망하던 스탈린은 쿠데타가 일어난 지 3개월 만에 본격적으로 개입한 것이다.
스탈린의 개입과 함께 스페인 대통령을 중심으로 국제여단, 소련의 스탈린이 힘을 보태며 팽팽한 구도를 형성했고 멕시코가 무기를 지원했고 프랑코 장군 쪽은 독일, 루마니아, 이탈리아 포르투갈이 합류했다. 이렇게 스페인 내전은 20세기 이념의 격전장이었다.
히틀러에게 최신형 전투기가 있었다면, 소련에는 최신형 탱크 T-34가 있었다. 스탈린이 신형 탱크를 보낸 이유는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신형 탱크의 성능을 실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소련 역시 철저하게 이익을 계산하며 스페인 내전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또한 스탈린의 원조 대가로 스페인은 공화국이 가지고 있던 700톤의 금 중에 500톤을 스탈린에게 넘겨주었다. 소련이 가져간 금은 현 약 13조 원의 가치이다.
게르니카 폭격
1936년 프랑코 장군은 수도 마드리드에 무차별 공중 폭격을 가하지만 수도 점렴에 실패하자 스페인 북부의 게르니카로 향한다. 이곳에 무차별 융단폭격을 가했고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후 반란 진영은 게르니카를 점령한다.
게르니카 폭격 이후 -> 카탈루냐 공격
프랑코는 승기를 잡자 격렬하게 공세를 이어나갔고 공화지역이 장악한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카탈루냐 지역을 장악하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공화진영의 지도자들은 수도 마드리드를 떠나서 바르셀로나로 옮겨간 상황으로 바르셀로나는 공화진영의 거점이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스페인 내에서 노동운동이 가장 강력했던 곳이 바르셀로나였기 때문에 프랑코와는 절대 공존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1938년 7월 25일 이렇게 스페인 내전 최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프랑크는 에브로강을 둘러싼 스페인 내정 중 최대 규모의 공중전을 실시하고 히틀러는 이번에도 신무기를 실험하기 위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13일 동안 지속된 싸움으로 약 75000명의 병사가 사망했고 계속된 고립에 무기까지 떨어져 싸울 힘을 잃게 되었다. 신무기를 활용한 전략으로 에브로강 전투의 승리는 반란 진영의 승리로 끝이 난다.
스페인 내전 종식
바르셀로나 입성후 프랑코 군대는 5일 만에 시민 1만여 명을 학살한다. 필사적으로 탈출한 피난민조차 폭격을 가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스페인 내전을 지켜보던 영국과 프랑스는 프랑코 정부를 정식으로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1939년 3월 말 프랑코 군대는 마드리드에 입성하고 4월 1일을 기점으로 스페인 내전은 종식을 선언한다.
스페인 내전 이후
그 후 프랑코 독재는 무려 36년 동안 지속되었다. 스페인 내전으로 최소 38만 명 최대 73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트라우마를 남기게 되었고 스페인 내전으로 자신감을 얻은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유럽의 정복자를 꿈꾸며 제2차 세계대전을 벌이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 속 수많은 인류의 갈등은 어떤 소득도 없이 죽음이 죽음을 증오는 증오를 낳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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