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으로 향한 이토 히로부미
러일 전쟁의 중단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최고 서열 원로 이토 히로부미에게 비난의 화살이 돌아가면서 정치적 입지가 좁아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다시 세력을 키우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는 제국주의 성립을 위해 대한제국으로 향하게 되고 그의 목적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을사늑약 체결
이에 이토는 대한제국의 대신들을 압박해 황제의 승인없이 을사오적에 의해 찬성을 얻었다고 발표하며 을사늑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로써 한국의 외교권은 모두 일본에 넘어가게 된다. 을사늑약 후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대신하고 내정 장악을 위해 일제가 설치한 통감부의 대표 초대 한국 통감에 취임하게 된다.
한국 통감부 깃발
통관취임 후 가장 먼저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부 깃발을 내다 걸었는데 깃발의 ¼4을 일장기로 채워 넣은 한국통감부 깃발이었다. 호주, 뉴질랜드, 피지등의 국가 깃발도 이와 같은 모습이다.
통감이 된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침략을 위한 발판이자 대한제국 수탈을 위해 대한제국을 근대화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이토 히로부미의 근대화 정책
근대화 학교 설립, 농사개량, 도로정책 배수로 개선을 통해 농업생산량을 높이려고 했다. 그 중에 이토 히로부미가 가장 신경썼던 것은 황제권을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당시 고종 황제는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해외에 알리려고 많은 기사와 밀사등을 보냈고 지방의 봉기를 지원하고 있었다.
고종 강제 폐위
헤이그 특사 파견의 이유로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 황제를 황제의 자리에서 밀어내고 대한제국을 직접 통치하기로 결심한다. 결국 1905년 고종 황제는 강제 폐위를 당한다. 그 뒤에 고종 황제의 아들 순종이 즉위하면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된다. 이토 히로부미는 순종으로부터 모든 국권을 일임받게 되고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 해산했다. 저항은 점점 커졌고 분노는 의병 운동으로 이어져서 전국 곳곳에서 항일 운동이 발생했다.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암살
1909년 8월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정부로부터 새로운 임무를 맡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에게 러시아의 재무대신을 만나 한일병합에 대한 일본의 방침을 미리 암시하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10월 하얼빈에서 러시아 재무대신과 만나기로 약속을 한다. 운명의 날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는 하얼빈에 도착하게 되고 이때 안중근 의사에 저격당해 이토 히로부미는 사망한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가 채가구역과 하얼빈역 어디서 내릴지 동선을 정확히 몰랐기 때문에 채가구역에서 내리면 우덕순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내리면 안중근 의사가 처단하기로 약속했고 행동 지침까지 갖췄던 의사들이었다. 그리고 하얼빈에게 세발의 총성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는 그 자리에서 사망한다. 그리고 거사 5개월 뒤 안중근 의사는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공개되지 않은 사망영상
이때의 영상이 남아있으나 안중근 의사가 끌려가는 영상은 남아있으나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당하는 영상은 없는데 그 이유는 일본이 이 영상을 지웠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있는 영상은 그의 방문을 기념하여 당시 러시아인 촬영기사가 촬영한 영상으로 사건이 발생하자 촬영기사에게 원본 영상을 구입후 그 과정에서 일본과 계약을 맺고 원본 이외의 영상이 배포될 시 일본이 촬영기사의 자산을 모두 몰수한다는 조건이었다. 결국 일본 측에 의해 안중근 의거 장면은 공개되지 않았던 것이다.
대한제국의 저항이 외부에 노출되는 것에 대해 극히 우려했던 일본이었다. 대외적으로 한국인이 원해서 통감부를 설치했고 외부의 눈을 의식해서 조약을 통해 모든 과정을 이어나가고 있었는데 이토 히로부미를 한국인이 사살한 것이 외부에 알려지면 한국인이 저항한다는 것이 알려지기 때문이었다. 총에 맞은 이토 히로부미는 열차 안으로 옮겨졌고 응급 처치를 받았지만 폐를 관통한 총알이 치명상이 되어 오전 10시에 사망하게 된다.
그의 죽음은 서양에서도 큰 이슈가 되었다. 이 기사를 통해 이토 히로부미는 이미 서양에서는 유력한 정치인으로 알려져있었음을 알수 있다. 1909년 11월 4일 천황의 윤허로 일본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국장이 치러졌다. 당시 그의나이 69세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세계의 냉엄한 현실을 깨닫고 새로운 국가 건설에 참여하게 된다. 그렇게 이토가 설계한 근대 국가는 단기적으로는 부강한 국가라는 목표를 성공적으로 이뤄내지만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제국주의의 시작이었고 장기적으로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는 분위기를 낳았다. 그 결과는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수많은 목숨이 한순간에 사라지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제국주의 끝은 힘으로 일어난 국가는 결국 또 다른 힘에 무너졌듯이 부강한 국가의 역할이 무엇인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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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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