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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History/art&culture

미켈란젤로 피에타 조각상, 다비드상 이야기

르네상스 미술을 이끈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라는 사람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는 완전히 상반된 인물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유하지 않은 성격에 주변 사람들과 다툼이 잦았지만 예술에 대한 열정은 남달랐다. 

 

미켈란젤로의 생가

미켈란젤로가 태어난 곳은 이탈리아의 카프레세라는 작은 마을인데 미켈란젤로가 유명해지면서 마을 이름을 <카프레세 미켈란젤로> 로 변경했다. 

 

카프레세 미켈란젤로
카프레세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의 어린 시절 


어릴때 부터 미술 공부의 기회가 있었던 미켈란젤로였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을 일찍 알아보고 미켈란젤로는 13살의 나이에 피렌체 공방에 가게 된다. 그곳에서 약 1년을 보낸 후 미켈란젤로의 인생을 뒤바꾼 로렌초 데 메디치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로렌초는 막대한 자금을 들여서 예술가를 후원하고 있었다. 이때 로렌초의 눈에 띈것이 미켈란젤로였고 메디치 가문의 소장품들을 보며 조각에 집중할수 있었던 미켈란젤로였다.  

 

 

미켈란젤로의 작품들 

피에타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가문의 후원에 힘입어 로마에 입성하게 되고 이곳에서 피에타라는 조각품을 완성하게 된다. 성모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린 그리스도의 시체를 안고 슬퍼하는 작품이다. 현재는 성 베드로 성당에 있다. 

 

피에타

피에타라는 작품은 "자비를 베푸소서" 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린 그리스도의 시체를 안고 슬퍼하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현제 로마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에 있다.

 

피에타가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찬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너무 섬세함과 정교함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근육과 골격, 힘줄까지 사람과 거의 비슷하게 조각이 되어 있다. 심지어 목주름과 신체의 디테일까지 완벽하다.  


위대한 작품이라는 극찬도 있었으나 예수님이 성모 마리아 대비 너무 작아 보인다는 논란도 있었다. 그러나 위에서 내려다보면 예수님이 사뭇 달라보이는 크기이다. 미켈란젤로는 정면에서 보는 일반인들이 아니라 하늘에서 지켜보는 하느님을 위한 작품이라는 설이 있다. 

 

 

미켈란젤로의 섬세하고 정교한 기법의 비밀
메디치 가문에 입성해서 미켈란젤로가 심취했던 것은 해부학으로 피에타 작업 전 직접 해부할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도 했다.  당시는 방부제도 없고 했던 시절이라 시신을 받으면 약 2~3일 동안 꼬박 해부만 해야 했다.  해부를 통해 인체의 미세한 부분까지 탐구하고자 했다. 

 

실제 미켈란젤로 스케치 노트
실제 미켈란젤로 스케치 노트



 이러한 지식을 토대로 더 섬세하고 정확한 표현이 가능했던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대리석의 한쪽 면만을 파내면서 조각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미켈란젤로는 조각할 형상이 대리석 안에 갇혀 있는 것이라 생각했고 조각품의 다른 부위를 떼어낸다는 생각으로 조각을 했던 것이다.  

 

중세시대의 피에타 작품과 비교 슬픈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목조 피에타
중세시대의 피에타 작품과 비교 슬픈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목조 피에타


미켈란젤로 피에타는 절제된 표현 속 더 깊은 슬픔이 느껴진다. 이 조각을 만들었을때의 미켈란젤로이 나이는 24살이었다.  이 작품으로 미켈란젤로는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된다.  

고향인 피렌체에 거대한 대리석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미켈란젤로는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이때 레오나르도 역시 17년간의 밀라노 생활을 청산하고 피렌체로 돌아와 있었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23살이나 되었으나 서로를 정말 싫어했다.  

 

다비스상  

미켈란젤로는 정부로 부터 골리앗을 무찌른 성경 속의 영웅 다비드 조각상 제작을 의뢰받게 되고 이 당시 피렌체에서 다비드상은 인기 많은 주제였다. 이미 예전부터 많이 만들어져왔던 주제였고 많은 조각가들이 골리앗의 머리를 밟고 있는 승리를 거둔 어린 소년을 묘사했었다.

 

도나텔로 다비드산(1408년 왼쪽) / 베로키오 다비드상(1475년)
도나텔로 다비드산(1408년 왼쪽) / 베로키오 다비드상(1475년)

미켈란젤로는 다비드상 의뢰 3년 만에 작품을 완성하고 공개하게 된다. 이때 공개된 다비드상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소년이 아닌 출정을 앞둔 비장한 표정의 성인 남자로 묘사했다.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속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속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두상이 일반 인체 비율에 비해 크게 표현됨
두상이 일반 인체 비율에 비해 크게 표현됨 

정면에서 보면 얼굴이 커 보인다. 그러나 사람들이 조각상을 위로 올려다 보는 것을 감안해서 원근법을 고려한 조각법으로 아래에서 보면 알맞은 비율의 조각상이다. 

 

다비드의 얼굴을 왼쪽으로 틀어서 적을 노려보는 듯한 매서운 표정을 묘사했다.
다비드의 얼굴을 왼쪽으로 틀어서 적을 노려보는 듯한 매서운 표정을 묘사했다.
손의 힘줄과 다리 근육은 전쟁을 나가기 직전의 긴장감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
손의 힘줄과 다리 근육은 전쟁을 나가기 직전의 긴장감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

 

이전 작품과는 다르게 조각상이 나체로 표현되었는데 이는 나체야말로 신의 가장 순수한 표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미켈란젤로만의 표현 기법이다. 

 

시뇨리아 광장에 놓인 다비드상

피렌체 정부의 주문으로 만들어진 다비드 상을 피렌체 지도자들은 다비드 상을 놓을 위치를 선정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위원회를 만들었는데 위원회 구성원에는  사이가 좋지 않은 레오나르도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다비드상이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에 놓이기를 원했고 레오나르도는 반대를 했다. 

 

 

처음에는 미켈란젤로의 의도대로 시뇨리아 앞광장에 놓여지게 되었다. 이것은 고대 이후 공공장소에 전시된 최초의 나체상 타이틀을 획득했다.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다가 1873년 보존상의 이유로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겨졌다. 

[벌거벗은 세계사 66회 ]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 무엇이 특별한가?

로마로 향했던 미켈란젤로는 당시 율리오 2세 교황으로 부터 시스티나 성당의 대형 천장화 작업을 의뢰받게 된다. 천정화는 어려운 기술을 요하는 작업이었고 미켈란젤로는 해본적이 없었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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