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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Here

다산초당, 사의재 : 정약용의 강진 유배생활 어땠을까?

조선시대 사형 다음가는 형벌은 유배형이었다. 죄의 경중에 따라 2000리, 2500리 등으로 유배지 거리가 정해진다. 유배가 무서운 이유는 언제 유배가 끝날지, 언제 사약이 내릴지 알수 없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은 의학에도 능통했고 간축과 토목, 각종 정치, 철학, 경제 모든 방면에서 능했다.

 

정약용은 누구? 

조선 22대왕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정약용은 유배생활중 강진 산골짜기 다산초당에서  500권이 넘는 책을 썻다. 조선 왕조 500년 사상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보였는데 홍역 치료에 관한 의서 마과회통, 정조의 능행차를 위한 한강에 배다리를 고안, 수원화성 축성을 위해 거중기를 설계하여 노동력과 건설비용을 절감시켰다. 

 

거중기

 

이 거중기 덕분에 10년을 예상했던 수원화성 축조를 단 2년 9개월만에 마치게 된다. 화성 건설을 통해 정약용은 정조의 신임을 받아 승승장구한다. 그러던 어느 날 1800년 8월 8일 갑작스런 정조의 죽음으로 조선 23대 왕 순조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되고 순조의 증조할머니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수렴청정이 시작된다.

 

정약용이 유배를 간 이유 

이듬해 1801년 신유사옥이 일어난다. 정약용의 셋째 형제 정약전이 천주교 책을 운반하다가 발각된다. 정조를 지지하던 시파 관료를 대거 숙청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때 정약용의 천주교도 전력을 문제삼아 셋째 형 정약종을 참수, 둘째 형 정약전과 정약용을 각각 완도 외딴섬 신지도와 포항 장기로 유배를 보냈다. 

 

사의재

 

그러나 신유사옥에서 끝나지 않았다. 1801년 천주교도 중의 하나였던 황사영이 천주교를 박해하는 조선에 프랑스 군대를 파견해달라는 편지를 쓰다가 발각이 되어 또다시 피바람이 분다. 황사영은 정약용의 조카사위였다. 이때 수많은 정약용의 일가친척이 사형을 당하거나 유배를 가게 된다. 둘째 형 정약전은 신지도에서 흑산도로 다시 유배를 가게 되고, 포항 쪽 장기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정약용 또다시 강진 땅 유배지에 1801년 도착한다. 

 

주막 사의재 

 

그러나 강진의 어떤 사람도 유배를 온 정약용을 반겨주지 않았다. 오직 한 사람 주막집 할머니만 정약용을 반겼고 그렇게 정약용은 할머니의 주막집에서 4년동안 생활한다. 그리고 자기가 살고 있는 골방에 사의재라는 이름을 붙인다. 

 

사의 : 생각, 용모, 말씨, 언어 네 가지 의로움을 생각하라.

 

그리고 정약용은 이 집에서 4년동안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기른다. 처음에는 페족이 된 신세를 한탄하며 술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실의에 빠져있던 정약용에게 주모 할머니가 아이들를 가르쳐보라고 권유했다.

 

주모 할머니 동상

 

그렇게 정약용은 삶의 의지를 회복하게 된다. 정약용은 아동의 한자 학습을 위하여 아학편을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친다. 그의 가르침이 점차 입소문을 타게 된다.

 

다산초당 

정약용은 주막 사의재에서 4년, 고성사 보은산방에서 아홉달, 제자 이학래의 집에서 2년을 보낸 뒤 마지막 거처인 다산초당에 10년을 보낸다. 

 

다산초당

 

다산은 자기 문집에 다산초당을 자하산방이라고 부르곤 했다. 다산초당이 있던 자리에 자하산방의 터이다. 1957년 그 초당을 복원해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해 이렇게 초가집 대신 기와로 만들었다. 

 

옛날 자하산방때는 초가집이었다.

 

다산초당에는 정약용이 아꼈던 연지석가산 연못이 남아있고 초당 아래에는 다산과 제자들이 차를 달여 마시던 다조가 있다. 그리고 초당 뒤에는 차를 끓일 때 썼던 찬물을 떠오는 약천이 있다. 또한 정약용이 유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바위에 '정석' 이라는 글짜를 새겨놨다. 

 

 

 

글짜를 새긴 의미는 강진에서의 생활을 잊지않겠다는 의미와 더불어 자신의 존재가 지워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정약용은 초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책을 저술한다. 10년 동안 다산초당에서 집필한 저서는 무려 182책 503권으로 18명의 제자들과 함께 이뤄낸 것이다. 

 

유배자 다산의 스폰서는? 

초당의 원래주인은 강진 명문가의 귤동마을 해남 윤씨, 윤단(귤림처사 윤단: 1744~1821) 이었다. 그는 자신의 손자들 교육을 위해 정약용을 초빙했고 그가 머물장소로 초당을 준다. 훗날 윤단의 손자 6명은 모두 정약용의 제자가 된다.  

 

다산초당 우치

 

정약용의 어머니 또한 해남 윤씨여서 윤단은 정약용의 멋 외갓집이었다. 그리고 정약용을 지원한 또 다른 해남 윤씨 윤광택이 있다. 강진의 갑부였던 그는 정약용의 부친 정재원과 절친한 사이였다. 윤광택의 아들 윤서유와 정약용은 죽마고우였다. 훗날 두 사람은 사돈지간이 된다. 

 

명발당 윤광택 고택

 

집필에 필요한 종이공급과 자료수집은 해남 윤씨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훗날 폐가로 방치됐던 초당을 복원한 것도 이들 해남 윤씨들이다. 이 초당에서 세상을 개혁할 원칙과 방안을 제시한 1표 2서, 그의 정치 철학이 총망라된 여유당전서는 정약용 사후에 발간되었다. 

 

▼정약용 저서들, 하피첩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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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3년 정약용에게 기쁜 소식이 들린다. 정약용을 딸이 강진 생활을 도운 친구 윤서유의 아들에게 시집을 간다. 아버지 정약용은 하얀 매화 가지에 새 두마리가 한 방향을 보고 있는 매조도 그림을 그린다. 아버지 없이 자란 딸에 대한 미안함과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그림이다. 

 

매화병제도, 매조도

 

1818년 길었던 유배생활이 풀린다. 그러나 정계 복귀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신에 500권이 넘는 저술서를 통해 개혁론 사상이 완성된다. 1836년 정약용이 죽을 때까지 그의 저작물은 어디에도 출판되지 못했다. 1930년대 정약용의 여유당문집이 발간되면서 정약용의 책들이 빛을 보게 된다.  외가, 사돈댁이 있던 유배자 정약용에게 강진은 낯선 땅이 아닌 친근한 땅이였을 것이다. 정약용은 부유한 생활을 누리지는 못했으나 다른 유배자에 비해 자유롭고 여유로웠던 강진의 유배생활이었으나 살아 생전에 그의 사상과 그의 끔을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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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박해 역사 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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