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저널 396]
누르하치는 만주어로 멧돼지 가죽이라는 뜻이다.
금나라는 여진족이 지금의 지린성 헤이룽장성에 세웠던 나라로 건국 후 120년 만에 원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북방의 강자였던 금나라가 원에 의해 멸망 당한 뒤 부족단위로 흩어져 살았고 보호받을 나라가 없었던 여진족은 약탈을 일삼거나 조선과 명에 의존했다. 이런 나라 없는 설움이 누르하치를 보다 강건하게 했을 것이다.
1583년 한 여진족 추장이 명나라에 반란을 일으킨다. 이때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추장을 설득하기 위해 성에 들어갔는데 그때 마침 성을 기습공격했던 명나라에게 반란군으로 오인을 받아서 살해되었다.
누르하치 최고 지도자 되다.
사실 누르하치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돈독하지 않았다. 10살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계모에게 구박을 받다가 독립하였고 그때 요동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명문가의 도움을 받아 생활하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명으로부터 벼슬과 교역권을 받았고 아버지가 이끌던 부족도 이어받게 된다. 누르하치가 힘을 키울수 있었던 것은 인삼교역으로 세력을 키웠다. 하지만 누르하치를 반대하는 이들도 많았고 병력도 약 100여명, 갑옷 13벌 로 열악한 상황이었으나 누르하치는 이런 상황에서 누르하치는 5년만에 건주여진을 통일했고 군사를 일으킨 지 33년 만에 후금을 건국하고 최고 지도자 '한'의 자리에 오른다. 그 이유는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파병을 하느라 누르하치를 신경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르하치는 매순간 목숨을 걸고 싸웠고 무엇보다 자신의 장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후금을 세운 후 누르하치는 여진족만 우대하지 않았다. 팔기군 제도를 만들어 다민족을 받아들였다. 누르하치에게 큰 힘이 되었던 세력은 결혼 동맹으로 맺은 인척관계들이었다. 특히 몽골세력과 결혼해 동맹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여진족의 문자 만주어를 만들었다.
그리고 후금을 세운지 2년 뒤 1618년 명나라에 전쟁을 선포한다. 명나라의 교역 요충지를 하나씩 함락시키며 명나라를 도발했다. 명나라의 만력제는 후금과 전쟁을 했고 조선에도 파병을 요구 광해군은 어쩔수 없이 1만3천명을 보냈다. 명나라와 후금의 첫 대규모 전쟁이자 1619년 3월 명나라의 약 10만 대군이 후금을 공격한 사르후 전투가 시작된다.
청나라 탄생의 서막이 된 전투 사르후 전투 (누르하치의 7대한)
누르하치 사망
누르하치는 영원성 전투 이후 갑자기 사망한다. 누르하치의 사망 원인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영원성 전투에서 파편에 맞아 죽었다는 설, 전투 패배 충격으로 사망했다는 설등이 있었다.
1626년 누르하치는 사망하면서 16명의 아들 중 3명의 아들과 한명의 조카에게 후계를 동시에 넘겨 4명의 후계자가 공동으로 통치를 하도록 했고 그래도 지도자가 필요하기에 나이와 서열이 가장 낮은 ‘홍타이지’를 '한'로 추대했다. 홍타이지는 누르하치의 8번째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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