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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벌거벗은 한국사

김삿갓은 누구? 유명한 시 , 삿갓을 쓴 이유 , 무덤은 어디? 73

조선의 27대 왕 순조가 다스리던 시기에 방방곡곡을 떠돌며 살았던 김삿갓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김삿갓의 신분은 기반 세력과 살림이 아주 보잘것 없는 양반인 잔반이었다. 잔반은 중앙정치에서 밀려난 몰락한 양반을 뜻한다. 

 

김삿갓은 누구? 

김삿갓은 집안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린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당시 높은 위세를 자랑했던 장동 김씨 집안이었다. 안동 김씨의 분파로 장동 김씨 가문이었고 경복궁 북쪽 근처에 위치한 지금의 효자동 창성동 통의동을 일컫는 지역이다.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이었다.  아버지는 김안근으로 4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장동 김씨들은 안동 김씨에서 분파되었지만 순조의 외척이였기 때문 자신들은 특별한 존재라 생각했다. 그들은 왕실의 외척으로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세도정치를 펼쳤던 세력이었다. 

 

그런데 명문가 장동 김씨 도련님은 어떻게 잔반으로 몰락한 것일까? 군사값이 다섯 살이 되던 1811년 평안도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다.  부패한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고통받았던 백성들은 난을 일으킨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 반란군이 김삿갓 집안의 목을 조여온다. 홍경래의 기세가 점점 맹령해 지더니 평안도 선천에 있던 김삿갓의 할아버지 김익순이 있던 곳까지 처들어 온다. 그러나 대부분의 김익순 수족이 반군으로 돌아섰던 상태였고 백성들마저 도망을 쳤고 결국 반군의 회유와 권유에 김익순은 항복을 하고 만다. 그러나 몇일 후 홍경래가 사망하면서 난이 진압되자 김익순은 반군에게 항복했다는 이유로 능지처참을 당하게 된다. 

 

 

 

당시 조선의 형벌은 명나라의 대명률을 참고하고 있었는데 대명률에는 대역죄인의 가족에게도 연좌제도를 적용하고 있었다. 일가족을 없애는 멸족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대역죄인 연좌제 형

김익순은 자신이 항복을 하게 되면 자신의 가족에게 어떤 일 이 벌어질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족에게 닥쳐올 형벌을 피하기 위해 가족의 안전을 위해 피신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래서 김삿갓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동생 둘을 데리고 경기도 광주로 피신을 했고 5살 김삿갓은 형과 함께 황해도 곡산으로 도망쳤다. 이렇게 가족들이 뿔뿔히 흩어져 숨어살게 된 것이다. 

 

김삿갓의 유명한 시 

이제 그는 대역죄인의 후손으로 가문을 숨겨야 하는 잔반이 된 김병연으로 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김삿갓은 타고난 영재여서 열 살 전후에 사서삼경을 독파했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서당에 다니면서 꾸준히 공부를 했다. 

 

김삿갓이 8살때 새를 잡으려고 지붕에 올라갔다가 기와장을 깨뜨리자 훈장님이 회초리 12대를 맞을 것인지 시를 지을 것인지 물었고 이에 김삿갓은 시를 짓겠다고 한다. 그런데 훈장님이 내놓은 시제는 12개의 갈 '지' 자였다. 

 

이 시제를 이용해 김삿갓은 시를 써내려 갔다. 

 

그렇게 가족과 떨어져 산 지 3년 후 1815년 드디어 김삿갓은 부모님과 경기도 광주에 살수 있게 된다. 그러나 장동 김씨 가문에서 김삿갓의 가문을 족보에서 지우겠다고 한 것이다. 이에 김삿갓의 아버지는 벼량 끝에 내몰린 심정으로 울화병에 걸려 결국 세상을 떠난다. 김삿갓의 어머니는 이후 가족들을 데리고 김삿갓의 가족을 아무도 모르는 곳인 강원도 영월 깊은 산속에 숨어 살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20살 청년으로 성장한 김삿갓은 양반집 규슈 황씨와 결혼해 아들을 얻었고 자신의 재능을 활용해 시골 훈장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훈장일 외에도 생계를 위해 농사, 돗자리 짜기, 땔감베어 팔기등 힘든 일도 마다않고 일을 했다.

김삿갓이 삿갓을 쓰게 된 이유 

그러던 어느날 김삿갓은 세도가문의 힘을 빌어서 과거시험을 치르겠다는 결심을 하고 세도가문의 문객 생활을 하다가 이름도 바꾸고 과거시험을 보러 시험장에 들어갔다. 그러나 당시 세도가문의 응시생들이 김삿갓이 대역죄인의 집안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대역죄인의 자손과 엮인다면 출세의 걸림돌이 될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김삿갓을 차가운 눈빛으로 박대했고 이에 김삿갓은 크게 실망하여 과거 시험을 포기하고 뛰쳐나온 것이다. 한양에 올라왔던 김삿갓은 공정히 시험을 치를 기회조차 얻지 못했던 것이다. 쉽게 지워지지 않는 대역죄인의 자손이라는 꼬리표는 지울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마침내 그는 결심한다. 

 

김삿갓은 이때부터 양반의 상징인 갓을 벗고 거친 대나무로 엮은 삿갓을 쓰기 시작한다.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세상을 등지기로 결심한 것이다.  김삿갓의 삿갓은 자신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그의 확고한 의지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김삿갓의 방랑 생활이 시작된다. 

 

김삿갓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사연은 방랑생활을 하던 중 누군가에게 시를 지어주니 그는 김삿갓의 이름을 물어보았고 이에 김삿갓은 자신의 이름을 김립이라고 말을 했다. 립은 삿갓 립자이다. 이후부터 자신의 이름을 김립이라 칭하고 철저히 신분을 감춘 김삿갓이었다. 

 

김삿갓이 방랑생활을 3년가까지 하면서 한반도 북쪽에서 양반들 사이에서 시 쓰는 능력으로 김삿갓의 이름이 유명세를 타며 오르내리기 시작한다. 

 

그 일화로 양반집으로 지나가던 김삿갓은 시제로 토론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모여 있던 양반집안으로 들어가 자신도 시를 한수 짓겠다고 하니 김삿갓을 망신주기 위해 지저분한 요강을 시제로 준것이다. 이에 김삿갓은 '요강' 이라는 시제를 이용해 아주 아름다운 시를 쓴 것이다. 

 

요강

체통이 중요했던 조선시대 양반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다양한 소재로 시를 썼던 김삿갓이다. 술을 좋아하는 양반 혈사이에서 천재적인 제주로 시를 쓰는 김삿갓은 유명 인사가 되었다. 

 

한 양반이 딸을 잃고 딸의 무덤터를 찾고 있었는데 그러다 아주 좋은 터인 자리를 찾게 되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이미 어느 백성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묘가 있었고 이에 양반은 원래 있던 무덤 사이에 딸의 묘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얼토당토않는 일을 겪은 땅주인은 부당한 일을 당했으나 양반을 상대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 억울한 사연을 가진 광주의 내 집에 김삿갓이 방문하게 되고 우연히 이 사연을 들은 김삿갓은 한끼 식사에 대한 은혜를 갚겠다며 붓을 집어 든다. 그 시가 바로 '묘쟁'이라는 시이다. 

 

묘자리 논쟁 : 묘쟁

몇 자리 논쟁이라면 시의 제목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딸이 외관남자를 오가며 문란한 생활을 한 것이고 오해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양반은 이 시를 읽자마자 얼굴이 빨게지면서 곧장 하인들을 불러 다른 곳으로 딸의 묘를 이장시켰다고 한다. 김삿갓은 파격적인 시로 백성의 억울한 일을 해결해 준 것이다. 

 

구 라는 시는 언뜻 보면 충직한 개에 대한 시를 쓴것으로 보여진다. 백성들은 이 시를 보고 열광한다. 

 

마지막 시구절의 내용은 능력없는 벼슬아치는 개만도 못하다는 내용인 것이다 .당시 조선말기 탐관오리의 심각한 횡포에도 속수무책이었던 백성들이었다. 이런 백성들의 답답한 속을 백성들을 대신해 한 편의  시로 탐관오리들을 비판했던 것이다. 

 

 

영웅으로 칭송받기 시작한 김삿갓의 방랑 여정은 전국 8도를 넘나들기 시작했으며 이런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자 김삿갓을 행세를 하며 생계가 힘든 잔들이 끼니와 잠자리를 해결하기 위해 김삿갓을 사칭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전해지는 시 중에도 가짜 김삿갓의 시가 많이 존재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김삿갓의 소식이 뜸해지고 흉흉한 소문마저 퍼지기 시작한다. 바로 김삿갓이 죽었다는 것이다. 백성들은 김삿갓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큰길에 '곡풍방월' 이라는 시제를 써놨다. 

 

 

그러나 몇날 며칠이 지나도 누구도 시를 남기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어느 날  김삿갓은 이곳에 이런 시를 남겼다. 

 

 

어느 덧 약 20년의 방랑생활을 한 김삿갓은 40대가 되었고 이런 아버지를 찾기 위해 둘째 아들 김익균이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강원도 평강에서 아버지를 만나게 되지만 다시 김삿갓은 도망을 간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를 더 이상 찾지 않았다. 

 

 

 

김삿갓 무덤

1866년 아들 김익균은 아버지가 이미 3년전에 전라남도 화순에서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전해듣는다. 이에 아들은 화순에 있던 김삿갓의 유해를 가족이 있던 강원도 영월로 이장했다. 지금도 강원도 영월 곳곳에는 김삿갓의 흔적을 볼수 있다. 영월에서는 매년 9월, 10월 김삿갓을 추모하기 위한 다양한 문화공연이 열리는 김삿갓 문화제가 열린다. 

 

김삿갓 가족들이 살았던 생가에는 김삿갓 관광해설사가 거주
축제 중에는 한시 백일장도 열린다.
김삿갓의 무덤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8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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