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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벌거벗은 한국사

하륜 이방원의 킹메이커 : 왜 정도전을 죽였을까? 72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 시대의 이인자이자 조선개국 일등 공신이다. 태조 이성계의 오른팔이 정도전이였다면 태종 이방원의 오른팔은 하륜이었다.  하륜은 태종 핵심 참모이자 굳건한 이인자였다.  

 

 

하륜은 누구? 

하륜과 정도전은 그들이 모시던 일인자 이방원 이성계와 똑같은 운명을 걷게 된다. 1365년 고려 공민왕 시기에 개경에서 과거시험이 열리던 날이었다. 하륜의 고향은 진주였다 진주에서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었던 하륜의 집안은 사실 출세하는 거리가 먼 집안이었다. 

 

 

이런 집안에서 자란 하륜은 나이가 들면서 집안 어른들과 다르게 성공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다. 이에 과거 시험에 합격하겠다는 굳은 의지로 서울에 올라온 하륜은 드디어 문과에 19세에 급제하게 된다. 과거 급제 후 하륜의 좌주는 이인복이라는 인물이었다. 

 

좌주문생

이인복은 고려정계의 핵심 세력 권문세족의 출신이자 공민왕을 모시던 최측근이었다. 그렇게 권력의 중심에 있던 이인복의 문생이 되었고 이인복은 자신의 조카와 하륜을 소개해 혼인을 주선했고 마침내 그의 조카사위가 된 것이다. 이 결혼은 하륜에게 엄청난 기회가 되었다. 

 

정도전과 하륜

또한 하륜에게는 또 다른 인연이 만들어진다. 성리학의 대부이자 신진사대부로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했던 뛰어난 유학자 이색을 좌주로 두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륜은 이색을 통해 많은 신진사대부와 인연을 맺는다. 그중에 최대의 인연인 정도전이었다.  이렇게 정도전과 하륜이 이색의 제자로 처음 만나게 된 것이다. 

 

21세에 하륜은 중앙 정계에 들어서게 되고  1374년 당시 왕이던 공민왕이 침전에서 살해당한 채 발견된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공민왕에게는 세자가 없었다. 이때 이인임이 우왕을 옹립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하륜은 조카사위로써 출세깃이 열린 것이다. 

 

 

이와 반대로 정도전은 이인임이 득세하던 1375년 원나라에서 온 사신을 영접하라는 명령을 거부하면서  유배를 가게 된다. 이인임의 정권아래 정도전과 하륜의 처지가 갈리게 된다. 8년 후 1383년 권문세족의 부패를 없애기로 결심하고 함경북도의 이성계를 만나 새로운 나라를 만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1년 후 정계로 돌아온 정도전이었다. 

 

1388년 이인임은 유배를 가게 된다. 부패한 권문세족의 횡포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우왕은 신진사대부에게 그들을 처단할 것을 명령을 내리면서 고려의 정치세력이 바뀌게 된 것이다.  이때 하륜도 이인임 가문이라는 이유로 유배를 가게 된다. 그로부터 2개월 후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면서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왕으로 세운 것이다. 이때 유배지에 있던 하륜은 정계로 복귀가 된다. 1388년 이인임이 유배지에서 사망하면서 관련 인물들을 면죄해주기도 했던 것이다. 

 

윤이 이초 사건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와 정도전은 고려 왕조를 바꿔야 한다는 급진적인 개혁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온건 개혁파들은 고려는 그대로 두되 폐단만 고치자는 의견이었다. 

 

 

하륜은 정도전과 달리 온건개혁파였다. 하륜의 스승이 온건 개혁파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1390년 충격적 사건이 하나 터진다. 고려의 무신 윤이 이초가 명나라로 가서 황제에게 충격적인 고발을 했다. 이성계가 군대를 동원해 명나라를 공격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 내용에 급진개혁파는 분노하게 되고 이에 온건개혁파를 숙청을 하게 된다. 그리고 하륜은 윤이 이초사건 이후 모든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 진주로 내려갔다. 하륜이 낙향한 3개월 후 1392년 마침내 조선이 건국된다. 

 

수도 천도 문제 

태조 이성계는 개국후 반대파를 수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이에 하륜을 정계로 불러들인 것이다. 종 2품 관찰사로 임명된다.  이후에 조선 조정은 수도천도 문제가 부각되었다. 처음에는 계룡산일대로 천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하륜은 풍수지리에 조예가 깊은 그는 계룡산 일대에 도읍을 건설하는데 적당하지 못하다고 했고 태조는 이에 전면 취소하게 된다. 

 

그래서 대안으로 하륜은 지금의 신촌, 연희동 일대로 수도천도 대안을 내놓는다. 그러나 정도전은 수도천도를 반대한다. 그러나 이때 태조는 정도전의 반대에도 천도를 강행하기로 한다. 결국 정도전은 천도하겠다는 태조의 뜻에 따르기로 한다. 그리고 정도전이 내놓은 천도 지를 지금의 경복궁 위치  한양 (북악산 일대)였다. 땅이 넓고 사방이 산이어서 적으로부터 방어하기 좋고 나라의 중앙에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하륜은 이 자리를 반대했다. 그리고 정도전이 선택한 한양은 북악산 일대로 정해졌다. 

 

표전문 사건 

그러던 어느 날 명나라에서 정도전을 압송하라는 명령이 전해진다. 명으로 보낸 표전문이 명나라를 모욕하는 글이 있다는 것이었다. 표전문은 중국 황제에게 올리는 표문과 황태자에게 올리는 전문을 합친 말이다. 이것을 쓴 사람이 누구냐고 사신에게 물었고 사신은 정도전이라고 말했다. 다시 사신을 보 정도전이 아니라고 했으나 명나라 황제는 그래도 정도전으로 데려오라는 것이었다. 당시 정도전이 추진 중인 군사 개편의 일환으로 진법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이런 행동이 명나라를 치기 위해 행동일 거라 생각하고 정도전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하륜의 지방직 임명

이에 태조는 정도전 대신 사신으로 하륜을 보내게 되고 하륜은 표전문 읽는 형식에 익숙지 않아 생긴 오해라고 명나라 황제를 겨우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임무를 완수한 하륜은 무사히 조선으로 귀국을 한다. 그런데 조선으로 온 하륜은 지방으로 내려가라는 어명을 받게 된다. 온건개혁파의 입지가 높아지는 것 같자 이를 개국공신 세력이 견제하기 위해 하륜의 지방직 임명이 정해진 것이었다. 

 

한륜과 이방원의 만남

하륜은 이를 돌파하기 위해 이방원의 장인 민제를 찾아간다. 그리고 이방원의 관상을 극찬하면서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고 하륜은 이방원이 왕위를 노린다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동생 방석이 세자로 책봉된 후 이방원은 정계에서 완전히 소외되었던 이방원이었다. 이렇게 하륜은 이방원의 킹메이커로 나섰다.  

 

1398년 5월 정도전은 왕자들의 사병을 몰수하는 사병혁파를 했다. 정도전은 세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이방원을 견제하고 있었고 그때 하륜은 이방원에게 선수 쳐서 제거하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정도전의 죽음

하륜의 조언에 이방원은 정도전을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하륜이 갑자기 충청도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이방원은 사병혁파로 거사를 치를 군사도 없는데 설상가상으로 하륜까지 떠나게 된 상황이었다. 그래서 하륜은 자신의 환송회날 이방원과 얘기를 하기 위해 이방원 앞에 놓인 술상을 엎어 시간을 마련한 것이다. 화를 내고 간 이방원을 뒤따라 가서 계책을 알려준다.   

 

 

이방원과 친분이 있는 안산군수 이숙번의 군사를 이용하라는 것이었다. 거사일 즈음에 이숙번이 군사를 이끌고 왕후의 묘를 이장하러 한양에 올일이 있었기 때문에 정도전의 눈을 피해 군사를 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병사를 확보한 이방원은 거사를 치를 수 있었다. 

 

그렇게 1차 왕자의 난이 발발하게 된다. 그리고 하륜도 움직이게 된다. 충청도에 있던 하륜은 전방위로 믿을만한 사람들에게 이방원의 거사를 알리고 지원군을 모아 합류한 것이다. 이렇게 1차 왕자의 난은 성공했다. 그러나 이 난으로 정도전은 죽임을 당한다. 하륜의 조언대로 정도전부터 급습한 이방원이었다. 그렇게 생을 마감한 정도전이었다.   

 

하륜의 업적 

1398년 9월 5일 태조는 둘째 이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조선의 두 번째 왕 정종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하지만 실권자는 이방원이었다.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흘러 1400년 11월  태종 이방원이 왕으로 등극하게 되고 말단 관직에서 시작해서 드디어 태종의 오른팔까지 오른 하륜이었다.  

 

그리고 하륜은 여러 가지 업적을 남긴다. 1400년 4월에 정사를 의논하는 조선시대 최고 행정기구 의정부를 만들었고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해결할 목적으로 대궐 밖에 북을 설치하는 신문고를 만들었다.  조선의 신분제 구축부터 조세제도의 인재 등용제도를 정비하기까지 했다. 

 

 

정도전이 조선 개국에 일조했다면 하륜은 조선 체제의 기틀을 잡은 인물이다. 이렇게 하륜은 태종과 무려 16년을 함께 일한다. 하륜은 고위직에 오래 있었으나 자신의 세력을 만들지 않았고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오직 태종을 위해 헌신했던 조력자로 태종 곁에 남아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태종도 하륜을 끝까지 믿고 의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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