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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 중국 공산당 탄생 역사 (쑨원 - 마오쩌둥 - 덩샤오핑) 중화민국 탄생 전 청나라 인구의 절대다수는 농민이었다. 그러나 지주 계급이 농민에게 소작을 주던 봉건 방식을 농민 착취의 수단으로 활용을 했던 것이다. 지주의 세금까지 떠맡으면 착취당했고 점점 중국인들의 삶은 피폐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중국인들의 삶을 돌보기에는 너무 부패하고 무기력했던 청나라였다. ▷서태후 청나라 멸망시키다. (서태후 죽음까지) 67-2 쑨원의 중화민국 탄생 백성들은 불만이 쌓여갔고 결국 1911년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성립시킨 신해혁명이 발생한다. 300년의 역사를 지닌 청나라는 1912년 멸망하게 된다. 이후 쑨원을 중심으로 세워진 아시아 최초의 공화 정부 중화민국이 탄생한다. (바로 서태후 시절이다) 그러나 중화민국은 근대적 정치 체제를 추진할 준비가 안되어 있었다... 더보기
종묘사직이란?/ 종묘 정전/ 종묘에 공민왕을 모신 이유 종묘사직이란? 종묘사직을 줄여서 종사라고 하는데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고  사직은 토지신과 곡식신을 모시는 단이다. 좌묘우사로 정궁 기준으로 왼쪽에 종묘를 오른쪽에 사직단을 배치했다. 종사는 곧 국가 자체이다. 종묘사직의 제사가 단절이 되었다는 것은 나라가 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묘를 가보면 종묘대로가 있는데 굉장히 복잡하고 시끄럽다. 그러나 경내로 들어가는 순간 조용하다.  임진왜란 당시 도심의 궁궐이 모두 불타서 종묘만 남아 있었으므로 왜의 대장 평수가가 종묘에 거처하였는데 밤중에 괴이한 일이 많이 벌어졌다고 한다. 따르던 부하가 갑자기 죽는 일도 생기고 해서 왜이러냐고 부하에게 물어봤더니 어떤 사람이 이곳은 조선의 종묘로서 신령이 있는 곳이라고 하자 평수가가 두려워하여 종.. 더보기
문정왕후는 태릉에 왜 홀로 묻혔나? [역사저널 392회]   태릉의 상징 중 하나는 태릉선수촌 1966년 6월 국가대표선수의 강화 훈련을 위해 설립된 종합 선수합숙훈련장이 있고 태릉갈비도 유명하다. 또한 문정왕후 단릉인 태릉이 있다. 조선 왕릉은 총 15기의 단릉이 있는데 그 중에 왕비 홀로 묻힌 단릉은 총 12기가 있다. 12기의 왕비 단릉 중 태릉이 가장 큰 것이다.   그렇다면 문정왕후의 능이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며 왜 홀로 묻히게 되었을까?  사실 문정왕후는 남편 중종의 능이 있는 정릉에 묻히고 싶어했다. 그러나 중종과 약 14km 나 떨어져있는 곳에 홀로 묻히게 된다.    문정왕후 비판하는 이유조선왕조 기록에는 문정왕후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암탉 문정왕후로 인해 나라가 망한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비판의 이유는 .. 더보기
나당전쟁 이유 - 석문전투, 천성전투 문무왕 22세 때 문무왕의 아버지 김춘추 나당연합을 성사시켰다. 당시 신라를 압박하고 있던 백제 의자왕으로 인해 왜와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했던 김춘추였으나 모두 거절했고 당나라로 발길을 옮겨 당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645년 안시성 전투에서 고구려에 대패한 당나라도 신라의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에 648년에 나당연합이 결성되었던 것이다. 이 과정을 아들 문무왕은 옆에서 지켜보며 배웠던 것이다. 그러나 김춘추가 돌아온 지 2달 만에 당 태종이 사망하면서 고구려를 공격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로 인해 진덕여왕을 움직여 비단에 수를 놓아 태평송을 당에 보냈고 이 태평송을 당시 20대였던 김법민(문무왕)이 직접 바쳤다.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고 이 과정에서 문무왕에게 모멸감을 준 사건이.. 더보기
영릉 (세종대왕 왕릉) 이 옮겨진 이유는? [역사저널 391회 ] 능은 죽은 왕, 왕비등 죽은 자들을 위한 공간이지만 능을 조성하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능 위치, 조성방식은 후대인의 정치적 입장이 반영된 경우가 많다. 왕릉은 죽은 사람의 공간이기 보다는 산 사람들의 정치 공간이라고 볼수 있다. 재위 2년만에 문종이 서거하면서 단종이 즉위하게 된다. 충신들에게 힘있는 수양대군은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이자 멀리해야 하는 존재였다 .이에 수양대군은 살아남기 위해 김종서에게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1453년 단종 1년 발톱을 드러낸 수양대군이었다. 무력으로 조카인 단종을 밀어내고 왕의 자리에 오른것이다. 그러나 야심의 대가인지 세조의 뒤를 이를 맏아 의경세자가 세상을 떠난다. 세조는 이 비극을 아버지 세종의 능을 옮기는 것으로 비극에서 벗어나.. 더보기
장릉 (단종의 묘) 이야기 조선왕릉 중 도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왕릉은 강원도 영월의 단종 장릉이다. 당시 단종의 시신을 누구도 수습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영월 호장이었던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다. 세조가 왕권을 찬탈한 후 단종이 상황으로 물러나게 되니 단종복위운동이 1456년 일어나고 이것을 세조가 알게 되면서 거사는 실패로 돌아간다. 이때 세조는 사육신의 멸문지화를 명령하게 되고 여기서 끝나지 않고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가족) 의 무덤을 파헤쳐 유골을 바다에 버렸다. 무덤을 만들때 가장 금기하는 것이 물이 흐르는 곳이다. 이것은 세조의 분노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세조의 동생 금성대군마저도 모반에 가담 사약을 내렸다. 단종 사후 240년후 단종의 능에 큰 변화가 찾아오게 된다. 현.. 더보기
중국과 대만(타이완) 양국이 아닌 양안 관계인 이유 배경 적대적 관계의 쌍방이 극적으로 화해하거나 급격한 정책 전환을 뜻하는 관용어가 있는데 미국 닉슨 대통령은 뼈 속까지 반공주의자였다. 그런 사람이 중국을 방문했던 사건은 쇼크에 가까웠고 닉슨 인 차이나라는 오페라까지 만들어졌다. 미국이 대만과 수교 단절하기 전 상황 1972년 닉슨 대통령 방중 닉슨이 중국을 방문했던 해는 1972년이다. 이때 우리나라는 박정희 정부의 유신 선포가 있었다. 닉슨의 중국 방문이후 한국을 달래기 위해 닉스 정부는 미국 특사를 보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이 아시아의 공산화를 방치한다는 의심을 하게 되고 이에 자신이 대처해야 한다는 혼란한 국제정세 속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한 유신을 선포한다. 10월 유신 특별 선언문 초고에는 닉슨 방중으로 이런 조치를 한다는 문구가 있었을 .. 더보기
숭례문 방화사건 범인 누구? 범행이유 현재 남대문 시장 앞에 있는 숭례문은 원형의 것이 아니다. 2008년 2월 화재로 전소되었던 것을 복원한 것이다.예를 숭상한다는 뜻의 숭례문은 조선의 수도 한양도성의 정문으로 600년 동안 굳건히 그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한순간에 우리의 국보 1호는 화재로 사라져 버렸다.  숭례문 방화이유실시간으로 중계된 화재 현장에 온 국민이 충격에 빠졌다. 안타깝게도 숭례문은 석축만 남기고 모두 전소되었다.그러나 더 욱 충격적인 것은 이것은 단순 사고가 아닌 고의에 의한 방화였다. 방화범은 70대 남성으로 철학관을 운영하다 택지개발에 자신의 토지보상그이 적다는 이유로 불만을 품고 방화를 저질렀던 것이다.              방화범은 생수병 3통에 니스를 담아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2008년 2월 10일.. 더보기
다이애나 비, 영국이 그녀를 사랑했던 이유있다. 1981년 7월 영국 세인트폴 성당에서 열린 영국 왕실의 결혼식이 전 세계 50여 개국에 생중계되는 그야말로 세기의 결혼식이었다. 이날의 주인공은 영국 왕실의 서열 2 위 찰스 윈저 왕세자와 13살 차이 나는 이제 막 20 살이 된 유치원 보조교사 출신의 다이애나 스펜서였다. 이날의 결혼식은 슬픈 동화의 시작이었다. 다이애나 비는 누구인가? 우리가 알기로는 다이애나는 유치원 보조 교사로 일했다고 알고 있으나 실제로 다이애나 집안은 귀족 가문 출신이다. 다이애나의 성이 스펜서인데 Spencer 가문은 중세까지 올라가서 유서 깊은 가문이다. 영국 내전때 목숨을 잃었던 스튜어트 왕가였고 유명한 사람으로는 윈스턴 처칠의 조상과도 관련이 있다. 다이애나의 어린시절때는 왕실 땅과 인접해 있었던 스펜서 가문의 영지였.. 더보기
이완용 어떻게 친미파 -> 매국노 친일파가 되었나? 덕수궁의 일부였던 중명전(밝은 빛이 이어진다는 뜻)은 황실 도서관이었다. 광명이 계속 비추어야 할 이곳에서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1905년 11월 17일 저녁 일본헌병이 덕수궁 중명전에 들이닥친다. 퇴궐준비를 하던 대한제국의 대신들은 겁에 질려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일본 헌병은 대신들을 회의실에 밀어놓고 감금했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포기하는 조약에 찬성하라고 강요했던 것이다. 중명전은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아간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이다. 이때 을사늑약에 적극 찬성했던 단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완용이다. 이완용 일본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완용은 처음부터 친일파는 아니였다. 그는 처음에 일본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고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인물이었다. 이완용 어떻게 친미..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