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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묘 영릉을 이장한 이유 1450년 2월 17일 세종이 승하했다. 맏아들 문종은 유언에 따라 태종 세종의 부모님이 있는 헌릉 인근 수릉지에 왕릉을 조성한다. 그런데 그 터를 두고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장남을 잃고 손이 끊어지는 땅이라는 것이었다. 최양선의 말때문인지 1452년 5월 14일 문종이 3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1457년 10월 21일 문종의 외아들 단종 마져 17살에 사망하게 되니 단종을 밀어내고 왕이 된 세조 역시 맏아들 의경세자(덕종) 이 20살에 사망한다. 예종의 맏아들 인성대군도 3살때 죽었다. 결국 세종의 영릉은 여주지역으로 옮겨졌다. (그날 33) 세종의 묘(무덤) 를 예종은 왜 이장했나? 세종의 묘(무덤) 를 예종은 왜 이장했나? 세종의 묘를 이장한 이유 문종은 유교 경전뿐만 아니라 예체능,병법에도 능.. 더보기
모스크바 3상 회의 신탁통치 모스크바 3상 회의 해방 후 소련과 미국은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구실로 38선 이북은 소련이 이남은 미군이 주둔하게 된다. 소련은 김일성을 통한 간접 통치를 시작하게 되고 미국은 군정을 통해 직접 통치를 하게 된다. 그리고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 3국의 외상이 모여 당사자인 우리도 모르는 우리의 미래를 결정짓는 회의를 하고 있었다. 한국 문제를 비롯한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여러 지역의 문제점에 대해 협의하는 회의였다. 1945년 12월 29일 당시 남한에 들어와 있던 미군 측이 서울의 한 거리에서 신탁통치를 한다는 벽보를 보는 사람들의 표정을 찍은 것이다. 신탁통치란? 이 시기 한국 사회는 사회주의 국가를 세울 것인지 자본주의 국가를 세울 것인지에 대한 팽팽한 이념 대립.. 더보기
북한산 승가사와 고려 현종 고려시대 북한산은 삼각산으로 불렸는데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 봤을때 북한산의 세 봉우리 인수봉, 백운대, 노적봉이 마치 세 개의 뿔처럼 보여 삼각산이라 불렸다. 이 삼각산에 정종, 문종, 선종, 숙종,예종, 의종등 수많은 고려의 왕이 행차했었다. 북한산 승가사는 756년 신라 경덕왕 15년에 승려 수태에 의해 창건된 절로 당나라때 큰 업적을 쌓았고 생불로 불렸던 승가대사에 대한 사모의 마음이 담긴 절이다. 이 절에 고려 현종의 흔적이 있다. 승가사 약사전에는 승가대사 불상이 있는데 불상 광배 뒷면에 글이 적혀 있다. 승가대사는 정수리 구멍에 솜으로 막아놓은 구멍이 있었다. 이것을 낮에 막아놨다가 밤에 구멍을 열면 향기가 나와서 방에 퍼져 좋은 냄새를 풍겼다고 했고 대사가 항상 발을 씻는데 사람들이 그 물을.. 더보기
38선으로 나뉜 이유 : 트루먼 독트린 영향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전쟁 제 2차 세계대전 (1939~1945) 은 유럽, 아시아, 북아프리카, 태평양 등지에서 추축국과 연합국 사이에 벌어진 세계 규모의 전쟁으로 계속된 전쟁에 세계는 대혼란에 빠지고 수세에 몰린 독일의 항복으로 1945년 5월 끝나는 듯 했으나 끝까지 저항하는 일본군으로 인해 1945년 미국은 일본에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면서 일본은 유일한 핵무기 실전투입 사례의 전쟁국이 되었다. 이로인해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적 항복을 선언한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에도 해방이 찾아왔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였다. 38선을 나눈 이유 유럽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있었고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동시.. 더보기
부대찌개를 존슨탕이라 부른 이유 부대찌개는 한국 전쟁(1950~1953) 후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잉여 식재료(스팸, 소시지, 햄 등)와 한국식 고추장, 김치, 두부 등을 활용해 만든 음식이다. 당시 음식 재료가 귀했던 시절, 미군이 제공한 재료로 새로운 요리를 창조했는데, 이를 "부대에서 가져온 재료로 만든 찌개"라 하여 "부대찌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우리가 즐겨먹는 부대찌개를 한때 존슨탕이라고 불렀다.  "존슨탕"이라는 이름의 유래부대찌개를 "존슨탕"이라 부르게 된 이유는 한국 전쟁 이후 미군 부대와 관련된 역사적 맥락에서 비롯되었다. 부대찌개는 전쟁 후 미군 부대에서 나온 잉여 식재료(스팸, 소시지, 햄 등)를 한국 고유의 재료인 고추장, 김치, 두부 등과 결합해 만든 음식이다. 그런데 "존슨탕"이라는 이름은 1966년 미국 대.. 더보기
5.10 총선거: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적인 선거 해방 이후 한반도의 정부수립 문제를 두고 미소공동위원회가 세 차례 개최되었으나 미국과 소련의 입장차이로 결국 UN에 한반도 문제를 회부하게 된다.  이에 UN은 총선거를 실시하여 국가 수립안을 통과시키기로 하려했으나 북한은 UN의 결정을 거부한다. 당시 북한은 김일성 독제체제를 구축하고 있었으나 외부적으로는 평화공세를 하고 있던 때였다.  인구수를 보더라도 남측의 의석수가 많아서 북한에 불리한 상황이었다. 결국 남한만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 5.10 총선거란? 1948년 5월 10일은 제헌국회의원 선거일로 대한민국 헌법을 만들기 위한 국회 구성을 위해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일이었다. 5.10 총선거는 최초의 민주적 선거로 국민적 관심이 대단했다. 5.10 총선거는 대통령 선거가 아니다.  5.1.. 더보기
고려 거란의 3차 침입 : 강감찬 귀주대첩 , 흥화진 전투=삼교천 전투 [이전글] 거란 2차침입 1018년 12월 거란의 3차 침공이 있었다. 이번에 성종이 대신 오지는 않았으나 대신에 거란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한다. 소배압은 1차 침입때 서희와의 담판으로 유명했던 소손녕의 형이었다. 그리고 2차 침공때 개경을 함락시킨 경험이 있는 소배압이었다. 그러나 고려는 이를 대비해 고려군 20만 8여 명을 준비했고 고려를 이끄는 장군이 강감찬 장군이었다. 강감찬 흥화진 전투 (=삼교천 전투) 거란군의 기존 루트는 흥화진, 통주, 곽주를 거쳐 서경으로 오는 경로였기에 강감찬은 흥화진에서 첫 전투를 대비를 하고 있었다. 이곳은 2차 거란 침입때 양규 장군이 목숨걸고 지켜냈던 곳이다. 흥화진 전투에서 강감찬 장군은 흥화진 근처 삼교천이 흐르고 있었고 지형이 좁아지는 .. 더보기
105인 사건 : 신민회 해산을 위해 일제가 날조한 것은? 지속적인 구국활동에도 자주독립국가의 길은 멀기만 했다. 1905년 일제에 의한 강제 외교권 박탈과 통관부 설치로 내정을 장악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고 1907년 고종은 네덜란드 제 2차 평화 박람회에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사건이 들켜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위당한다. 1910년 경술국치의 한일 합병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국권 상실에 이르게 된다. 105인 사건 1911년 조선총독부는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을 사전에 탄압하기 위해 데라우치 마사다케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빌미로 독립운동가 600여 명을 검거한다. 아래 사진은 1911년 9월 공판정으로 끌려가는 신민회 인사들이다. 이 당시 죄수가 밖으로 나갈때 반드시 용수를 썻던 것이다. 1910년 8월 29일 한일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되고 그로부터 약 3개월 후.. 더보기
서희의 외교 담판: 거란의 1차 침입 [이전글]천추태후 이야기 거란과 고려는 태조 왕건때부터 악연이 시작된다. 당시 조선은 거란을 야만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만부교 사건으로 거란과 고려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만부교 낙타 사건 993년 고려가 건국된지 75년 되는 해로 이때가 고려 건국이래 처음으로 외세의 침략을 받았고 앞으로 27년 동안 거란의 큰 공격만 3 차례를 받게 된다. 거란과의 봉산군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선봉군 대장마저 포로로 붙잡혀 있던 상황이었다. 이후 안융진 전투가 벌어지고 이번에는 고려군이 승리하면서 다급해진 거란 장수 소손녕은 초조해지면서 협상을 제안한다. 당시 고려의 대신들은 고려 영토의 일부를 내놓자고 했으나 서희가 이를 반대하며 소손녕을 만나러 갔다. 소손녕은 고려를 신라를 계승한 땅이라고 말했고 이에 서.. 더보기
거란의 2차 고려 침입: 강조와 양규 장군의 죽음 [이전글] 거란 1차 침입 993년 거란의 1차 침략 이후 1009년 고려에서는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시켜 천추태후를 권좌에서 몰아낸 상황이었다. 이에 1010년 거란 6대 황제 야율융서는 강조의 변, 현종의 즉위를 거란 침략의 빌미로 삼아 그해 11월 거란 황제가 직접 기병 40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한다. 이것이 거란의 2차 침공이었다. 거란 2차 침공 이유 거란은 건국 초부터 권력싸움, 갈등이 황제가 죽을때 마다 빈번했다. 고려 강조의 정변이 일어났던 해 거란에서는 성종 모친 승천태후가 사망했다. 거란의 성종은 12세에 즉위하고 어린 황제 대신 어머니 승천태후가 섭정만 27년을 했던 것이다. 승천태후가 사망했으니 어머니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성종은 자신의 권위를 .. 더보기